생활담론을 거대담론으로 만든 저력

지난 8일 서울 민주노총 교육관에서 개최된 전국여성연대 출범 1주년 행사에선 ‘우리는 왜 촛불을 들었는가’란 주제의 기념 토론회가 있었다. 촛불의 시작을 알린 여학생들부터 ‘유모차 부대’까지 광우병 위험 쇠고기 반대 촛불정국에서 여성들의 활약은 매우 두드러진 것이었다. 무엇이 여성들에 앞장서 촛불을 들게 만들었던 것일까. 토론회는 이같은 질문에 답을 던졌다. 촛불정국에서 여성들의 활약과 고민, 이를 통해 여성 주도적 사회참여의 길을 모색한 토론회를 찾았다. /편집자

크지 않은 민주노총 교육관이 꽉 찼다. 엄마와 함께 찾아온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토론회의 추임새처럼 들려왔다. 오후 6시만 되면 ‘칼’처럼 냉방을 끊는 건물에서 촛불을 말하는 여성들의 열기는 더욱 뜨거웠다.

이강실 전국여성연대 공동대표가 토론회를 열었다. 이 대표는 “촛불에서 증명된 여성의 힘을 진단하고 향후 여성의 사회참여에 대한 방향을 점검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이 대표는 ‘촛불항쟁’과 여성의 참여 관계를 짚으며 “먹거리와 생명 등 여성과 직결된 사안이어서 여성의 참여가 촉발됐다는 일반적 분석을 넘어 이제 거대담론을 생활과제로부터 찾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며 “지금까지 여성운동이 거대담론 이야기만 하고 이를 생활과제로 녹여내지 못한 부분이 있었음을 상기시켜줬다”고 지적했다.

또 촛불의 확산 매개가 된 온라인 공간을 지목하며 “아날로그 정치에서 디지털 정치로의 이동을 다시 확신시켜줬다”며 “여성운동은 인식은 하고 있었지만 한계를 말하며 오프라인 중심의 교육과 조직, 홍보에만 치우쳤던 점을 반성하고 온라인 운동을 활성화시킬 방안을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촛불항쟁을 통해 분출된 여성들의 놀라운 사회의식과 참여의식은 여성운동의 일상화, 대중화를 위해 고민하던 여성운동진영에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며 “여성들이 자기 목소리를 냈다는 경험은 이후 다양한 사회적 의제들에 다시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시민사회신문DB>

유모차 부대는 촛불을 지키는 수호자 역할을 했다.

이정주 ICOOP생협연합회 회장은 “ICOOP생협에서 지난 5월 22일 집회에서 처음 썼던 ‘엄마가 뿔났다’라는 모 드라마 제목을 차용한 구호가 이젠 ‘국민들이 뿔났다’로 바뀌었다”고 소개한 후 “사실 생협 엄마들은 지난해부터 광우병의 위험을 알려왔으나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알리고 싶던 광우병의 위험에 대해 온 국민이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더 많은 엄마들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소비자 주체로 스스로 나서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평소엔 흩어진 개인이지만 소비자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수요와 공급은 결정된다”며 “미국에서 0-157 식중독 균이 발견돼 대규모 쇠고기 리콜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엄마들의 유통 감시 활동이 더욱 필요할 때”라고 밝혔다.

권현숙 고양여성회 회장은 지역여성들의 쇠고기 반대 활동 사례를 전하며 “시청 앞 집회 뿐 아니라 가고 싶어도 못가는 지역의 여성들이 더 적극적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다”며 “지역에서 주부들에게 앞으로 촛불이 어떻게 될 것 같냐고 물으면 ‘포기 못한다’, ‘끝까지 갈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온다”고 말했다. 또 “이제 아빠들, 가족들을 움직이는 힘이 더 모아질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심문희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사무총장은 “지난 85년 쇠고기 파동 때도 남성들이 포기한 투쟁을 여성 농민들이 소 고삐를 쥐고 다시 나선 적이 있다”며 “그 당시 ‘1천만 농민’을 앞세워 외쳤던 구호를 이젠 ‘300만 농민’으로 수정해야 할 정도로 농촌이 피폐화되고 있고, 앞으로도 더 심각해질 것이 눈이 보이는 상황에서 생산자로서의 대안을 가지고 대응하겠다”고 밝혀 큰 박수를 받았다.

촛불 든 여성의 내공 *돌봄을 책임지는 생활 밀착성 *규범적 남성들은 없는 상상력 *사회 약자로서 불공정에 민감 *쉽게 좌절않는 끈기와 결단력

김정아 민주노총 여성부장은 “오늘 이 자리에서 투쟁하는 각계의 여성들과 만날 수 있어 반갑고 기쁘다”며 “노동운동가라는 입장에서 주체적으로 투쟁해야 한다는 의식은 앞서지만 실제론 그렇지 못한 것과 비교해 재기발랄하고 독창적일 뿐 아니라 끈질기기까지 한 여성들과 국민들의 활동에 대중적 역동성의 희망을 가지게 된다”고 말했다.

또 “쇠고기 문제를 넘어 KTX 여승무원, 기륭과 이랜드 등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간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하고 함께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대부분 여성들로 자리를 채운 이날 토론회는 딱딱하고 논쟁적 분위기에서 벗어나 연대와 공감이 충만한 자리였다. 조중동 광고·구독 불매운동을 촉발시킨 ‘82cook.com’을 대표해 참석키로 한 관계자가 아픈 몸에도 쇠고기 반대 활동을 벌이다 이날 쓰러져 병원에 실려간 것이 큰 걱정과 아쉬움이었다.

‘여성은 수동적’ 인식 깼다 ‘고대녀’ 김지윤 씨 촛불정국에서 가장 주목받은 여성 개인을 꼽자면, 온라인 상에서 ‘고대녀’로 알려진 김지윤 씨(사진)를 들 수 있다. 김 씨는 이날 토론회에서 “고려대에서 출교를 당한 후 농성을 통해 올해 복학을 했다”며 “이를 통해 배운 ‘연대를 통해 싸우면 이긴다’는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이어 “‘어륀지’로 일컬어지는 교육파탄 정책 등을 펼친 이 정부가 누구를 위한 정부인지 쇠고기 협상을 통해 국민들이 확인한 것”이라며 “특히 후보 때부터 ‘마사지 걸’ 발언 등으로 누적된 여성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 씨는 “의대 친구들의 등록금은 연 1천500만원이 넘고 있다”며 “경제만은 살리겠다고 했지만 ‘747정책’을 ‘칠 수 있는 사기는 다 치는 정책’이라고 불릴 만큼 악화된 경제상황과 대통령 지지율과 월급 빼고는 모두 오른 물가로 국민들은 역시 분노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시종일관 톡톡튀는 비유와 날카로운 지적을 펼친 김 씨는 “이미 지난 3월에 대학생들은 등록금 인상에 반대하는 행진을 시작했다”며 “등록금 투쟁과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움직임은 하나의 방아쇠일 뿐 앞으로 이명박 정부 출범으로 팍팍해진 삶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과 저항이 터져 나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여성 노동자 임금이 남성 노동자 평균 61%에 불과한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의 물결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여성의 위치는 더욱 낮아질 것”이라며 “촛불의 희망은 여성이 억압받는 수동적 존재가 아닌 스스로 난관을 뚫을 수 있는 잡재력을 확인한 것”이라고 밝혔다. ‘정권퇴진’ 운동으로 나가야 한다고 강조한 김 씨는 ‘고대녀’란 수식이 부담스럽지만 앞으로도 사회참여에 적극 동참하겠다고 말했다. 물대포를 날려버린 ‘촛불수호자’ ‘유모차 부대’ 임미경 씨 평범한 주부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여준 다음 카페 ‘유모차 카페’의 임미경 씨(닉네임 ‘지구인’)는 촛불의 수호자 ‘유모차 부대’의 태동과 활동을 전했다. 입양 가정의 엄마였던 임 씨는 어느 날 입양한 아들 앞으로 온 별도의 건강보험카드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보건복지부랑 이야기해도 안되더라’는 입양 홍보회의 이야기를 듣고 ‘두고 보시라’고 한마디 던진 후 각종 사이트와 커뮤니티에 이 문제를 호소해 결국 한달여 만에 보건복지부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 “그 일로 온라인의 힘을 알게 됐죠. 그러다 육아카페에서 누군가 광우병 이야기를 꺼냈어요. 이전까지 육아에 정신없었던 엄마들이 공부를 시작하게 됐고 ‘정말 무섭구나’란 생각에 다시 온 사이트에 문제를 제기했어요.” 처음엔 ‘왕따’를 당할 정도로 호응이 없다가 한두명씩 오프라인에서 접하게 되고, 그것이 지난 5월 30일 300여명이 모인 ‘유모차 부대’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충남 아산에서 올라오거든요. 정부나 일부 언론은 우리가 무슨 투쟁이나 하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제가 봤던 촛불집회는 축제같이 평화로왔어요.” 정부에 대한 문제의식이 점차 조중동 등 보수언론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밝힌 임 씨는 “아직도 계속돼야 할 촛불집회를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 고민”이라며 당국의 서울시청 앞 광장 폐쇄에 분노했다. “처음엔 광우병 때문에 유모차를 끌고 나갔지만 이제 민영화와 대운하 등도 학습을 마친 상태”라며 “이들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가 선두에 나서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물대포를 한 번에 날려버린’ 유모차 부대의 활약은 계속될 전망이다. ‘배운 여자’들의 운동 상상력 ‘소울드레서’ 박지원 씨 “제가 말하자면 배후죠.” 정부와 보수언론이 심각하게 들먹이고 있는 ‘배후론’의 당사자라고 ‘서슴없이’ 웃으며 밝힌 인터넷 커뮤니티 ‘소울드레서’ 회원 박지원 씨(닉네임 ‘시지프’)는 그러나 그전까지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신 운영자의 ‘비리’로 문제가 일어난 패션관련 카페에서 나온 이들로 구성된 소울드레서에 참여 할 만큼 시시비비를 가릴 줄 알았다. “카페 게시판 중에 ‘휴게실’ 같은 공간이 있었어요. 거기에 광우병 관련 이야기들이 올라오면서 회원들이 관심을 갖게 됐죠. 그러다 온라인에서만 이야기 할게 아니라 오프로 나오자란 의견에 동참하게 된 것이죠.” 박 씨는 그 과정에서 별도의 카페 ‘정책반대 시민연대’를 만들었다. 극우 논객 조갑제 씨는 이를 ‘진보연대의 하수이며 빨갱이 연합’으로 몰았다. “졸지에 시민단체로 격상돼서 너무 황당하더라구요.” 그는 또 인터넷을 통해 집시법을 공부한 후 집회신고를 하면서 ‘60명 이상 나오면 무조건 사법처리 하겠다’는 역시 황당한 이야기를 경찰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소울드레서가 처음 주목을 받은 것은 최초의 반대의견 광고 때문이었다. “정부의 홍보 광고에 반발한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5일 만에 신문 1면 광고를 실을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모았죠.” 소울드레서를 시작으로 다양한 커뮤니티의 입장 광고가 실리기 시작했다. 참신한 아이디어는 계속됐다. 코엑스에서의 플래시몹(온라인을 통해 참여자를 모은 후 기습적으로 벌이는 퍼포먼스)도 네티즌들과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개방 정책의 피해자인 농촌도 돕고 ‘바른’ 언론에도 힘을 보태자는 취지로 직거래를 통해 구입한 수박을 한겨레 등에 보내기도 했다. “먹거리는 미래에 다가올 문제여서 민감하게 반응한 것 같아요. 소울드레서가 말하는 ‘배운여자’요? ‘자신이 아는 바를 실천에 옮기는 여자’란 뜻으로 카페 내에서 통용하던 ‘코드’였어요.”

이재환 기자

이재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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