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돌보는 공동체도 없다”
 |
Richard Sennett, The Corrosion of character : the personal consequences of work in the new capitalism, W. W. Norton · Company, Incorporated, 1998
“이름표를 붙여 내 가슴에~ 확실한 사랑의 도장을 찍어~”
가수 현철 씨가 부르는 ‘사랑의 이름표’란 노래의 첫 소절이다. 다른 사람이 내 사랑을 넘보지 않도록 애인에게 이름표를 붙여 달라는 다소 우스꽝스런 노래이다. 가끔 이 대목이 떠오를 때마다 참 절묘한 표현이란 생각이 든다. 이름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누구인지를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이름표는 보통 자신의 성명을 표시하지만 직장, 직위, 학력 등을 표시할 수도 있다. 누구의 자식이고 어떤 일을 하며 그 일에서 어느 정도 책임을 가지고 있는지, 어느 학교 출신인지 등은 내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방식 중 하나이다. 누군가에게 불린다는 것은 상대방이 인식하는 내 모습이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불리려면 상대방에게 잘 소개하고 또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도 그렇다. 외견이나 기능 등으로 상품들은 자동차, TV, 컴퓨터 등의 이름표가 붙는다. 그런데 상품에는 이름이 하나 더 있다. 2천만원, 100만원 등. 상품의 이러한 이름은 가격이라 한다. 자동차라는 같은 이름표를 달고 있어도 2천만원 하는 자동차와 1천만원하는 자동차는 똑같이 취급받지 않는다. 상품이 이렇게 화폐로 표시되는 가격으로 불리자 교환, 즉 거래는 더욱 용이해지고 시장은 더욱 확대되었다.
가격이란 이름표를 달자…
그런데 시장을 통해 상품이 가격이란 이름표를 달자 사람에게도 이름표가 하나 더 생겼다. 1천만원 하는 상품을 만드는 사람. 5만원 하는 상품을 만드는 사람. 다시 말해 1천만원 받는 일을 하는 사람. 5만원 받는 일을 하는 사람. 그러다보니 타인의 도움이 필요할 때 그 도움에도 가격이 붙었다. 예전에는 타인의 도움이 필요할 경우 비슷한 직업 또는 지역 공동체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거나 자신의 평소 행동에 따른 덕망이 해결해 주었다 한다. 하지만 이제는 덕망도 공동체도 굳이 필요치 않아지고 있다.
노동시장 유연화와 구조조정, 그리고 생활에 대한 공공의 보장 약화는 이제 1천만원 또는 5만원이라는 이름표에 전념을 다하게 한다. 누구는 자발적으로 앞서나가고 누구는 내몰리기도 하지만 그 흐름 속에 이전의 이름표들은 더 이상 자신을 소개하는데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리처드 세넷은 이 책에서 신경제라 지칭하던 시기 이후 미국 직업인들의 생활 모습을 담고 있다. 컨설팅을 하는 엔리코는 아버지에 비해 더 높은 소득과 사회적 지위로 신분상승을 이루어 보이지만 자기 삶의 불확실함과 불만이 작아 보이지 않는다. 윈도우 화면 상의 조작으로 빵을 굽는 제과점 조리실 사람들은 더 이상 제빵사로서의 자부심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IBM의 퇴직 엔지니어들은 기술변화에 한발 늦게 대응한 자신의 잘못을 책망하기도 한다.
 |
| <시민사회신문DB> |
| 노동시장 유연화와 구조조정, 그리고 생활에 대한 공공의 보장 약화는 이제 1천만원 또는 5만원이라는 이름표에 전념을 다하게 한다. KTX 여승무원들의 시위 모습. |
1990년대를 거치며 변해가는 미국인들의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삶을 떠오르게 한다. 미국인의 변화 모습에 대한 세넷의 분석은 정신을 차리고 봐도 어지러운 우리의 변화를 돌이켜 보고 가늠하게 한다.
이 책의 원제는 The Corrosion of Character이다. 얼핏 보기에 이것을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라고 명명한 문예출판사의 우리 글 판 제목은 좀 어색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성이 타고난 것만은 아닐뿐더러 우리의 삶을 통해 형성되는 자신의 특성과 관련을 맺는다는 점에서 적절하다.
변화의 상상력과 감성
책을 마치며 세넷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산악 도시 다보스의 도로에 들어선 리무진들과 경찰의 행렬을 뚫고 회의장을 드나들면서, 나는 이러한 체제는 적어도 그 산 아래 사는 사람들의 상상력과 감성에 대한 지배력만큼은 놓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우리가 왜 인간적으로 서로를 보살피며 살아야 하는지 그 소중한 이유를 제시해주지 못하는 체제라면 자신의 정통성을 오래 보존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사에 어설픈 필자가 용기를 내어 감히 말해본다. 이러한 체제를 벗어나는 데는 ‘예술혼’이 필요하다. 가격표 액수가 크건 작건 상관없이, 상상력과 감성에 따라 새로운 가능성의 창조를 위해 불타는 예술혼 말이다. 그리고 이들의 연대가 필요하다. 두 달 넘도록 타오르는 촛불 문화제(!)에 감격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백운광 두리미디어 주간
백운광
<저작권자 © 시민사회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민주당, 사하갑 이성권·이갑준 ‘부정선거 혐의’ 고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