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평화를 실현시키려던 천재

철학여행까페[40]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8.07.21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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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독일 중부 파더본에 있는 하인츠 닉스도르프 컴퓨터 박물관에 가면 1673년에 발명된 계산기가 전시되어 있다. 이 계산기는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 4가지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이 계산기는 2진법 체계를 사용한 것으로 오늘날 컴퓨터운영체제의 기본 원리를 사용한다. 컴퓨터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이 계산기를 만든 사람은 라이프니츠였다.

라이프니츠는 당시 파스칼이 발명했던 계산기를 컴퓨터와 같은 원리인 2진법의 원리를 적용한 계산기로 개량해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는 컴퓨터의 창안자라 할 만하다. 그는 계산기 이외에도 잠수함도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동희
라이프니츠
컴퓨터 창안자 라이프니츠


라이프니츠는 교수나 연구자로서 평생 대학에 몸담지 않았지만, 거의 모든 분야의 지식을 섭렵했다. 수학에서는 뉴턴과 더불어 미적분을 발견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미적분을 누가 먼저 발견했는가를 두고 뉴턴 및 그의 추종자들과 달갑지 않은 논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두 사람이 각기 발견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는 수학자이기 이전에 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법학자였고, 중국의 문자를 분석하는 등 보편 언어에 관심을 기울인 언어학자였으며, 역사학자였다. 또한 지질학, 광물학, 경제학을 탐구한 학자였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런 라이프니츠를 두고 ‘그가 바로 프러시아 전체 학술원’ 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라이프니츠는 엄청난 열정의 사람이었다. 그는 괴테의 파우스트 박사처럼 거의 모든 분야의 지식을 섭렵했다. 그러나 파우스트가 모든 지식을 섭렵한 후 인생의 회의에 빠졌다면, 라이프니츠는 죽을 때까지 광범위한 지식을 섭렵했으면서도 결코 세계와 인생에 대해 낙관적인 견해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는 신이 만든 최상의 가능한 세계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주의에 대하여 볼테르는 소설 <깡디드>에서 라이프니츠 철학을 대변하는 팡글로스를 등장시켜 신랄한 풍자와 함께 조소를 퍼부었다.

순진한 청년 깡디드는 스승 낙천주의 철학자 빵글로스의 가르침대로 세상은 ‘최선(最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으나 참혹한 전쟁과 굶주림, 광신, 지진, 난파, 질병, 온갖 만행과 약탈 등 인간의 모든 불행들을 경험하면서 빵글로스에게 이렇게 되묻는다.

“좋습니다. 빵글로스 선생님. 교수형을 당하시고, 의사에게 칼로 배를 갈리시고 그러고도 모자라 사정없이 몰매를 맞으시고, 또 갤리선에서 노예의 몸으로 노를 젓는 일을 당하셨으면서도 여전히 모든 것은 최선의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을 고집하시렵니까?”

이동희
라이프니츠 계산기
볼테르는 신의 섭리에 의한 막연한 낙관주의 대신에 ‘이제 우리가 뜰을 경작해야 할 때입니다’라는 깡디드의 말을 통해 세계를 개선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을 강조한다. 그러나 볼테르의 비판은 세계의 개선과 평화를 위한 라이프니츠의 엄청난 노력과 열정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볼테르의 비판

라이프니츠는 30년간에 걸친 종교전쟁으로 황폐해진 유럽사회를 보면서 유럽사회를 개선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중국’으로 대표되는 동양과 서양의 만남을 통해 인류와 세계의 개선을 꿈꾸었던 사람이었다.

이러한 평화에 대한 자기의 염원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는 교수직 제의도 뿌리치고 외교관이라는 직업을 선택하기도 했다. 그가 외교관으로 파리로 가게 된 까닭은 루이 14세의 네덜란드 공격 계획을 막아 유럽의 평화를 지키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1671년에 이집트 원정 계획Consilium Aegyptiacum을 기획해 프랑스의 루이 14세에게 네덜란드를 공격하는 대신에 터키와 이집트를 공격하라고 설득하고자 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이런 외교적 목적은 달성되지 못했고, 100년이 훨씬 지난 후에 나폴레옹에 의해 현실화된다.

외교관으로서 파리 체류 목적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그는 다른 한편으로 외교관 신분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신의 지적 욕구를 채웠다. 그는 데카르트가 남긴 비밀문서를 찾아 필사본으로 남기도 했고, 신학자인 아르노와 수학자 호이겐스 등을 만났다.

이 시기에 그는 미적분을 발견하고, 최초의 계산기 모델을 제작했다. 1673년 그는 찰스 2세를 만나기 위해 영국으로 여행을 떠났고, 1673년 4월 19일에 영국 왕립협회의 회원이 되기도 했다.

라이프니츠는 지치지 않고 평생 수많은 학자와 저명한 인사들을 만나 교류하고 서신 교환을 하였다. 그가 교류했던 인물들 중에는 러시아의 페테르 대제부터 중국의 강희 황제의 수학 가정교사였던 요하임 부베 선교사 까지 다양하고 광범위했다.

그가 이들과 교류하며 쓴 편지는 1만5천여 통이나 된다. 이 중에는 그가 말년에 중국의 주역과 성리학에 대해 쓴 서한도 있다. 라이프니츠가 이진법에 기초해 시도한 주역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까지도 주역의 중요한 해석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동희
아이작 뉴턴
라이프니츠가 평생 이루고자 노력했던 것은 신구교의 화해를 통한 유럽의 평화였고, 러시아를 가교로 해서 중국과 유럽의 문명적 교류를 통한 세계의 개선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그는 신교도이면서 가톨릭 교회와 가깝게 지내며 기독교 민족들의 조화와 평화를 열망했고, 러시아의 페테르 대제에게는 아시아와 유럽의 가교 역할을 하는 ‘러시아 학술원’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세계 평화에 대한 염원을 <노비시마 시니카>(최신 중국 소식)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우리 대륙의 두 극단, 즉 유럽과 사람들이 흔히 그렇게 부르는 것처럼 치나―중국은 동쪽의 유럽처럼 지구의 반대편을 빛내고 있다―에서 인류가 이룩한 최상의 문화와 기술적 문명이 오늘날 거의 똑같을 정도로 축적되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그것이 운명이 행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최상의 섭리가 어떤 목적을 수행하려고 이러한 지리적 배치를 해놓은 것처럼 보인다. 이 (지리적 배치의) 목적은 가장 문명화되었지만 (서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유럽과 중국’ 민족들이 그들의 팔을 서로에게 뻗침으로써 이 두 대륙 사이에 있는 모든 민족들을 점차로 합리적 생활 방식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러시아인들은 유럽과 중국을 연결하는 막대한 영토를 갖고 있으며, 얼어붙은 대양의 기슭을 따라 형성된 미개한 지역에 사는 북극 야만인들을 지배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현재 러시아를 통치하는 지배자(페테르 대제)와 그의 자문에 답해주며 그를 지지하고 있는 대주교가 우리(유럽인)가 이룩한 업적들을 앞지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나는 이 일들이 결코 우연하게 일어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의 섭리와 합리성

이 글에서 보듯 라이프니츠는 세계를 선한 목적으로 이끌어 간다는 신의 섭리를 굳게 믿었다. 그러나 볼테르가 비판하듯이 라이프니츠가 세계를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 없이 그냥 신의 섭리를 기대한 것만은 아니다. 라이프니츠는 세계 개선을 위해 엄청난 의지를 가지고 활동하며 노력했다. 이러한 라이프니츠의 활동과 노력을 보지 못하고, 그의 철학을 평한다는 것은 그의 철학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일이 될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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