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공직자가 연출한 퇴장의 미학

[강상헌 칼럼] 강상헌l승인2008.07.21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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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명이 좀 근사하고 딸린 식구가 많은 기구의 책임자가 이직(離職)을 할 때는 ‘경우의 수’에 따라 여러 상황이 벌어진다. 영전을 위해 그 자리를 물러나는 경우와 때가 되어 후진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경우의 두 가지로 크게 나눠 퇴임식의 풍경을 가정해 본다면, ‘세상인심’의 반영을 새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보내는 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떠나는 ‘그’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그 반대이기 쉽다. 이와 관련한 관행은 숱한 얘기를 부른다. 착하지 않은 모습도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상식과 평균에 근거한 추측이다. 그렇지 않은, 의외의 상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전라남도농업기술원(나주)에서 지난 7월 11일 열렸던 이 기구의 류인섭 원장 명예퇴임식 때 듣고 본 얘기들이다. 필자는 전라남도가 매년 여는 대한민국농업박람회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해온 까닭에 박람회 실무조직인 이 기구와 책임자들을 비교적 잘 안다. 그는 오래 이 기구의 장(長)을 맡았다. 대개는 2년, 길어야 3년 정도 일하다 물러나는 이 자리를 3명의 도지사를 겪으며 7년 6개월을 감당했다. 농촌지도소 직원으로 시작했던 그의 공무원 경력은 모두 38년여에 달한다. 정년을 2년 앞두고 ‘심사숙고 끝에 내린 선택’이라고 했다.

그 자리는 힘이 있는 자리, 소위 권좌(權座)는 아니다. 또 그의 퇴임이 ‘권좌’를 향한 발걸음도 아니었다. 그런데 행사장은 잔치 마냥 번잡하기까지 했다. 석별(惜別)의 아쉬움을 말하면서도 그의 직책에서의 보람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축제와도 같은 ‘퇴임식장’은 참 이색적이었다. 그가 행복해 보였다.참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공무원이나 일가친척 고향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전라도에서 한 농사 한다’는 농업인들과 농업단체 인사들이 특히 많았던 점이 특히 눈에 띄었다.

농업기술원은 기술적인 측면을 중심으로 한 ‘농촌진흥사업’을 전개하는 조직. 어려운 상황의 연속인 농업과 농촌의 최근 여러 국면에서 이 업무는 늘 우울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의 지휘봉은 늘 삽상한 바람을 불러왔다. ‘착한 농심(農心)과 어진 소비자의 만남’이라는 소담스런 뜻의 대한민국농업박람회는 의외의 ‘대박’을 기록하고 있다. 처음에는 이 조직의 가외업무로 그가 기획한 작은 규모의 행사였다. 눈덩이처럼 커진 것이다. 곧 국제규모 박람회로 확대 개편된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농촌진흥 공무원들과 현장 농업인들의 ‘농심’이 ‘우리 농업의 살 길이 여기 있다’며 똘똘 뭉쳤단다. 이 행사의 성공적인 전개에는 ‘좋은 먹거리’에 소비대중의 시선이 집중되는 시류(時流)도 중요한 역할을 했겠다. 이 자리에 공무원 가족 말고도 많은 이들이 모인 이유는, 이런 절차에서 생긴 동지애(同志愛)의 반영으로 봐야 할 것 같다.

‘화환과 석별금은 사양한다’는 문구가 붙었다. 공직자가 자녀를 결혼시킬 때 이런 팻말을 붙여 화제가 되기도 하지만, 퇴임식장에서는 아무래도 좀 특이한 풍경이다. 한의(韓醫)인 아들과 식구들이 밤을 새우며 포장한 한약을 ‘하객(賀客)’들에게 일일이 선물로 나눠주는 풍경도 같은 흐름에서 신선했다.

선물과 관련해 주객(主客)이 바뀐 것 아니냐고 묻자 그는 “이게 맞지요.”라고 대답했다. 주변의 한 인사는 ‘원래 그의 스타일’이라고 귀띔했다. 방문 때마다 ‘우리 시골에서 난 것’이라며 쌀 콩 된장 같은 것을 쥐어주며 “우리 고장 것이 최고지요.”하던 생각이 났다. 퇴임 결정 후 전격적으로 퇴임식을 치른 것도 얘깃거리였다. 여러 사람이 “행사 자체를 몰랐다.” “감사패 만들 시간도 안 주고, 얘기 나자마자 자리를 뜨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볼 멘 소리를 했지만, 이 역시 ‘그의 뜻’이었다고 한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여러 사람들이 한 얘기다. “박람회 개막식 때 ‘높은 사람들’ 축사 격려사 다 없앤 것만 봐도 알만 했어." “허허, 이젠 내 퇴임 때도 ‘고지서’ 보내는 일은 꿈도 못 꾸겠네 그려.” “그래도 서운해서 어떻게 해? 참 매정하구먼.” 그날 점심값은 농업인단체 대표들이 냈다. 한 인사가 그 자리에서 한 발언.

“이 자리는 그가 나가는 자리가 아니다. 그간의 식견과 경륜을 가지고 그가 농촌사회로 들어오는 자리다. 오늘은 우리 농업이 큰 인재 하나를 맞아들이는, 말하자면 신입사원 환영회와 같은 기쁜 날이다. 이제 그가 제대로 된 ‘희망농업’의 깃발을 들기를 기대한다.”

당연(當然)한 일이 눈길을 끄는 것은 실은 좋은 현상이 아니다.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얘기도 된다. 그가 물러나며 보여준 여러 ‘선택’은 당연한 것이다. 이제 그 ‘당연함’이 새로운, 착한 풍경으로 우리 사회에 드리워질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쓰디 쓴 자극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세상은 변한다. 이런 뜻과 ‘농업인’으로서의 그의 존재가 우리 사회에 크게 기여하기 바란다.


강상헌 논설위원

강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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