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탈 유

된장 한 숟가락 떠서 풀고, 마른 미역 톡톡 잘라서 불린 다음, 감자와 양파 숭숭 썰어서 넣습니다. 간장 한 숟가락과 깨 한 줌 넣고 마른국수 반 줌 끊은 뒤 마른오징어 잘라서 넣습니다. 밥은 콩과 팥과 옥수수알에다가 굵은 감자 한 알을 넣어서 짓습니다. 두 사람이 먹는 아침 밥상에 다른 반찬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한 그릇으로도 배가 부릅니다. 끄억 하고 트림 한 번 하고 배를 쓰다듬습니다. 저는 저대로, 옆지기는 옆지기대로 서로 좋아하는 책을 펼쳐서 읽습니다. 길고양이 두 마리는 종이상자로 마련한 집에서 웅크리며 빗소리를 듣습니다. 배고플 때는 나와서 밥을 먹습니다. 큰 녀석은 제 자전거 바퀴에 대고 자꾸만 발톱갈기를 합니다. “이 녀석!” 하고 외마디소리를 지를 때면 꽁무니를 빼고, 어느새 슬그머니 다가와 또 거기다 대고 발톱갈기를 합니다. 발톱갈기 할 자리는 따로 마련했건만.

밥먹는 자리에서 옆지기가 묻습니다. “이 냄비를 앞으로 몇 십 년 동안 쓸 수 있을까요?” “글쎄.” 날마다 쓰는 냄비는 불에 그슬리지 않고 오래오래 쓰고 있습니다. 어느덧 일곱 해째입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쓸 텐데, 서른 해쯤 더 쓰고 우리가 흙으로 돌아가면 우리 아이들이 물려받아서 쓰려나. 그때쯤 되면 다 닳아서 버려지려나. 낡은 냄비가 되면 우리 아이들이나 이웃집 사람들이 꽃그릇으로 삼아 흙을 담고 꽃씨를 심으려나.

오늘은 밥먹는 자리에서 <김수정-크리스탈 유>(1∼2, 태영문화사, 1994)를 읽습니다. 1990년부터 이태 동안 만화잡지 〈댕기〉에 실었던 작품입니다. ‘풍문여고’를 다니는 ‘유세차’라는 아이가 나오고, 이 아이네 아버지와 어머니는 허구헌날 물고뜯으며 싸웁니다. 아니, 싸운다기보다 홀쭉이 아버지가 뚱뚱이 어머니한테 얻어맞고 터지고 꾸지람을 듣습니다. 어머니한테 얻어맞고 집 밖으로 쫓겨난 아버지는 함께 쫓겨난 딸내미한테 “이 아빠 꿈이 뭔지 알아? 그냥 ‘행복’하게 사는 거야.”(2권 78쪽) 하고 말하며 웁니다.

옆에서 어깨 너머로 만화책을 함께 보는 옆지기가 문득 말문을 엽니다. “이 만화가 다 펜선으로 그린 거지요? …펜선으로 이렇게 그리기가 대단히 힘든데,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왜 만화를 무시하나 몰라. 연필선 그리기 힘든 줄 알면 펜선은 더 힘든 줄 알 텐데.” “경험이 없어서 그럴 테지요.”

옆지기 말을 듣고는 김수정 님 그림결을 다시 한 번 돌아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펜으로 죽죽 잇는 금이 한결 힘차고 매끄럽습니다. 군더더기나 티끌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에 그린 작품과 1990년대에 그린 작품은 벌어집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한결 깔끔해졌지만 줄거리에 힘알이가 없습니다. 너무 바삐 달려오느라 힘이 빠지셨나? 이제 배가 좀 부른 때를 맞이하셨나? 새로운 주인공과 줄거리를 짜내기가 벅차신가? 만화를 푸대접하는 세상에서 꿋꿋하게 싸우다가 지치셨나? 그러나 그때에나 이때에나 여고생이든 남중생이든 초등학생이든, 이 땅 아이들 눈높이에서 만화나 그림을 그려 아이들한테 읽히거나 보이는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