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과 조화를 추구한 철학자 '라이프니츠'

철학여행까페[41]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8.07.29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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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는 1646년 7월 1일 동독에 있는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는 30년 전쟁이 막 끝나가던 무렵이었다. 라이프니츠는 어릴 때부터 천재적 기질을 나타냈다. 그가 8세 때, 아무도 그에게 라틴어를 가르쳐 주지 않으려 하자 혼자 힘으로 라틴어 철자 읽는 법을 익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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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사본의 지진

그는 동판화로 장식된 리비우스의 책 표지에 있는 글자를 보고 그 낱말들의 뜻을 해독해 냈다. 그리고 낱말 의미들을 하나하나 해독해 본문을 읽었다고 한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논어나 맹자에 나온 어려운 한문을 가르침도 없이 스스로 터득한 셈이다.

라이프니츠는 1661년 15세의 나이에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했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학 박사 논문을 쓰고 법학박사를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 이유는 법학 교수들이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1666년에 뉘른베르크 교외의 작은 대학인 알트도르프 대학으로 옮겨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그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데카르트 철학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철학은 목적 개념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학문인 아리스토텔레스와 기계론적 인과론에 기초한 신학문인 데카르트라는 두 입장을 놓고 공방을 벌이던 때였다. 라이프니츠는 이때 이미 두 입장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고, 상반되는 기계론적 세계관과 목적론적인 우주를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그는 겉으로 볼 때 세계는 기계론적으로 설명 가능하지만, 보다 깊은 차원에서 보면 신이 이 세계를 만든 목적과 의도를 읽을 수 있다고 보았다.

알트도르프 대학은 젊지만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교수직을 제의하였으나, 그의 관심은 대학에만 머물러 있기에는 너무 다양했고 넓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1667년 가을에 뉘른베르크를 떠나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마인츠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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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시마 시니카 표지와 강희제의 초상
그는 마인츠에서 자신의 삶에 중요한 전기가 된 요한 크리스티안 폰 보이네부르크를 만난다. 보이네부르크는 교황권 제한주의파의 가톨릭 교도였지만 개신교도이면서도 신구교 일치를 주장한 라이프니츠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라이프니츠는 1671년에 이집트 원정 계획을 기획하고 1672년에는 보이네부르크의 후원으로 파리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 목적은 프랑스의 루이 14세에게 네덜란드를 공격하는 대신에 터키와 이집트를 공격하라고 설득하는 것이고, 이런 외교적 목적이 달성되지 못한 것을 지난 호에 언급했었다.

라이프니츠 자신은 이 여행으로 다른 수확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당시에 대단한 발전을 이룩했던 파리의 문화와 과학을 직접 접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몇 년 뒤 후원자였던 보이네부르크의 사망으로 그는 재정적 지원 없이 파리에 남게 된다.

그러던 중 라이프니츠는 1676년 10월 도서 책임자와 궁정 고문관으로 일하라는 하노버공의 제안을 받아들여 파리를 떠난다. 그는 런던, 암스테르담 그리고 헤이그를 거쳐 새로운 임지인 하노버에 도착한다. 그는 암스테르담에서 스피노자를 만났지만, 무신론자로 알려진 스피노자와 만난 사실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을 염려해서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공개하지 않았다.

라이프니츠는 1691년에 하노버의 볼펜뷔텔 궁정 도서관의 관장으로 임명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특이한 도서관장이었다. 어떤 사람이 책을 빌려가려 하면 몹시 화를 냈다고 한다. 어쩌면 도서관 관장 보다는 도서관 지기 역할에 충실했는지 모른다.

이 기간에 그는 여러 가지 저술들을 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1697년에 펴낸 <최신 중국 소식Novissima Sinica>이다. 이 책은 중국에 관해 직접 쓴 글, 그동안 중국에 관해 예수회 신부와 교환했던 서신들, 중국에 관한 자료들을 담은 책으로 라이프니츠의 중국에 대한 관심을 보여 준다.

라이프니츠는 요하임 부베 신부가 보낸 강희제의 전기인 <중국 황제전>도 강희제의 초상화와 함께 이 책의 부록으로 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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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버 라이프니츠의 집
1700년 3월 13일, 라이프니츠는 파리 학술원의 외국 회원으로 선출된다. 같은 해 7월에 그가 기획한 베를린 학술원이 브란덴부르크 영주 프리드리히 3세의 인정을 받아 출범한다. 라이프니츠는 7월 12일 이 단체의 회장으로 임명된다. 그리고 7월 15일에 브란덴부르크의 법률 담당 추밀 고문관이 된다. 1702년에는 <신정론>의 초고를 썼다.

1712년에 표트르 대제는 그를 법률 담당 추밀 고문관으로 임명한다. 라이프니츠는 1712년부터 1714년까지 오스트리아 빈에 체류했는데, 그곳에서 오이겐 왕자와 자주 만났고 결국 제국 궁정의 고문으로 임명된다. 이 시기에 그는 오이겐 왕자를 위해 소책자이지만 자신의 철학을 집약한 <모나드론>을 썼다.

모나드는 그리스어로 단일성을 의미하는 모나스에서 온 말이다. 모나드는 더 이상 나누어질 수 없는 가장 작은 단위의 단일성이다. 더 이상 나누어질 수 없기에 모나드는 연장을 가지지 않는다. 더 이상 나누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원자(Atom)와 같지만, 원자가 물질적이라면 모나드는 정신적이다.

무수히 많은 실체

이런 모나드는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많다. 스피노자가 하나의 실체를 주장했다면, 라이프니츠는 무수히 많은 실체를 주장한다. 모나드라는 실체는 가장 작은 단위로 자연을 구성하는 진정한 원자이자 사물의 원소이다. 이 실체는 ‘생성’도 ‘파괴’ 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떠한 모나드도 다른 모나드와 동일하지 않다. 모나드는 자립적인 존재로서 서로 영향을 받거나 영향을 줄 수 없다. 그래서 모나드는 ‘창’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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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가 잠든 노이슈데더 교회
그러면 개별적이고 자립적인 이 모나드들이 어떻게 사물을 구성하는 것일까? 모나드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으면서도 이 조화로운 자연을 어떻게 이루고 있는 것일까? 라이프니츠는 각 모나드는 어떠한 창도 갖고 있지 않지만 다른 모나드와 상호 작용할 수 있도록 미리 프로그램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시계를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두 대의 시계가 각각 떨어져 있다 해도 미리 완벽하게 맞추어 놓는다면 시계는 같은 시각에 매번 똑 같이 종을 울릴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맞추기 위해 매번 노력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소위 예정조화설인데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모든 모나드는 창조될 때 이미 신에 의해 서로 조화할 수 있도록 설계 되었다는 것이다.

세계는 겉으로 볼 때 기계론적으로 설명 가능하지만 그 배후에는 이런 신의 섭리가 작용한다. 라이프니츠는 신의 섭리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는 모든 가능한 세계들 중 최선의 세계라고 주장한다. 완전한 존재인 신은 세계를 만들 때 최선의 세계를 만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라이프니츠의 세계관은 지난 호에 언급한 것처럼 볼테르 등에게 신랄할 비판을 받았다. 볼테르가 물었듯이, 신이 만든 최선의 세계에서 왜 리스본의 대지진이 발생하고 사람들이 악을 저지르는 것일까?

라이프니츠는 <신정론>에서 이렇게 대답한다. 첫 번째 악은 모든 피조물의 불완전한 성질에서 비롯된다. 완벽하다면 그것은 신이고, 악할 수가 없다. 두 번째 악은 자연에서 발생하는 악이다. 신은 자연의 악을 꼭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은 죄에 대한 벌로서, 또 때로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또는 더 큰 악을 저지하거나 보다 더 큰 선을 실현하기 위해 자연의 악을 원할 수 있다. 세 번째 인간이 저지르는 도덕적 악은 인간의 자유의 결과이다. 신은 가장 선한 것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고, 이에 따라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기에 ‘선’ 뿐만 아니라 ‘악’을 선택할 수 있다. 신은 ‘악’을 원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악을 허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개체의 자유와 다양성

라이프니츠의 철학에서는 독립된 개체의 자유와 다양성을 인정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악’은 그러한 개체의 자유와 다양성에서 빚어지는 결과이다. 그러나 그는 ‘악’을 넘어서서 개체의 자유와 다양성이 빚어내는, 신이 예정한 조화로운 세계를 믿었다.

개인의 자유와 세계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또한 다양한 개체들이 이루는 조화로운 세상을 믿었던 라이프니츠는 1716년 11월 4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신의 선한 세계를 믿었던 그는 임종 시에 고백성사를 거부당했다고 한다. 그가 생전에 교회에 자주 나가지 않았고, 교회 공동체와도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비신자라는 것이었다. 장례를 집전하려는 성직자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분야에서 눈부신 활약과 업적을 남긴 그의 장례식에는 비서만이 참석했다. 나중에 프랑스 학술원이 그를 추도하는 글을 발표한 것이 유일한 의식이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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