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공룡 둘리

더운 여름날, 창문을 모두 열어 놓고 아침부터 밤까지 지냅니다. 창문을 닫고 잠깐만 있어도 집이 후끈후끈합니다. 지난해와 견준다면 덜 덥구나 싶지만, 지난해를 치르면서 몸이 더위에 어느 만큼 맞추어졌는지 모릅니다. 여태껏 선풍기를 안 쓰고 부채로만 지냈는데, 이달 끝무렵 아기를 낳을 옆지기가 밤에 너무 힘들어 해서 선풍기를 그제부터 처음 돌립니다. 저로서는 열세 해 만에 쓰는 선풍기입니다. 더우면 더운 대로 땀을 흘린 다음, 손빨래를 한두 점씩 하면서 몸을 식혔습니다만, 나날이 뜨거워지는 날씨를 맨몸뚱이로 견디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 두 식구가 제아무리 에어컨이고 냉장고고 텔레비전이서 세탁기고 자가용이고 뭐고 뭐고 하는 전기제품을 안 쓰고 자원 쓰일 일을 안 한다고 하더라도 요즈음 세상에 손빨래 하는 집이 얼마나 되며, 새 옷 안 사 입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 테며, 운전면허증조차 안 따려고 하는 사람이 있기나 한지요. 승강기 아닌 계단을 타고, 대중교통 또한 잘 안 타며 걷거나 자전거로 볼일을 보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될까 모르겠습니다. 북녘사람마따나 ‘고난의 강행군’이 아니라 쓸 까닭이 없으니 안 쓰고, 덜 쓰는 삶이 훨씬 즐겁고 가볍고 단출하기 때문에 좋아서 덜 씁니다.

가톨릭 생협에서 파는 식혜를 한 모금 마시며 숨을 돌린 다음 만화가 김수정 님의 <아기 공룡 둘리>(예원,1990)를 펼칩니다. “나도 뜨뜻한 안방에 베개 깔고 누워 오징어나 뜯으며 TV나 보고 소일 하는 게 제일 좋아.”(7권 41쪽) 둘리네를 ‘먹여살리고 방도 내어준’ 고길동 씨는 둘리네와 함께 우주여행을 하던 가운데 포로가 되어 서로 툭탁거리다가 한 마디 합니다. 당신은 그저 도시에서 회사 다니며 부장으로 올라가기를 기다리고, 좀 더 넓고 어엿한 자기 집을 장만해서 골프하러 다니거나 자가용 끌고 아이들하고 놀러다니는 삶을 바랄 뿐이랍니다. 세상이 이렇게 되건 저렇게 되건 아랑곳하지 않는 마음이고, 이웃집에 불이 났으면 불구경을 할 뿐인 삶입니다. 만화에서는 허구헌 날 둘리네를 두들겨 패고 괴롭히니 나쁜 사람처럼 보일지 모르나 ‘평범한 도시 소시민’을 꿈꾸는 분한테는 ‘집이며 부모며 없이 떠도는 둘리네’가 조금도 달가울 수 없습니다. 때때로 동냥을 해 줄는지 몰라도 늘 함께 지내며 돕고 사랑을 나눌 ‘한 마을 사람’으로 여기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때까지 살아 있을까?” “있을 거야, 길동이 등살에도 꿋꿋하게 살아 있잖아?”(6권 153쪽) 둘리며 도우너며 또치며 희동이며 모두들 자기 집이 있고 어머니가 있었으나 어찌어찌하여 뜻하지 않게 서울 한복판에 들어오게 되었고, 얹혀지내며 눈치밥 먹는 삶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모두들 어린이요 어린 마음이라 틈나는 대로 장난과 놀이를 즐깁니다. 어느 하루 눈물콧물 없이 살 수 있으랴만 기운을 잃는 적은 한 번도 없이 늘 새마음 새힘으로 어깨동무를 합니다. ‘부자가 되기를’ 꿈꾸기도 하지만 저희끼리 잘 먹으려는 부자가 아닙니다. 부자가 될 수 있음에도 ‘친구가 더 중요’하다며 돈을 내동댕이치기도 합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둘리나 우리 이웃이나 ‘돈을 더 크게’ 여기면 밉살맞습니다. 사랑스럽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