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노예를 샀던 철학자 버클리

철학여행까페[44]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8.08.25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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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클리(1685~1753)는 로크와 흄과 더불어 영국 경험론의 3인방 중 한 사람이다. 버클리의 철학은 잘 모르는 사람은 많아도 그의 이름은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도시 버클리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버클리라는 도시 이름과 미국 예일 대학에 있는 버클리라는 단과대학은 모두 철학자 버클리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이동희
버클리
그의 이름을 딴 도시


버클리가 이렇게 미국의 도시와 예일 대학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게 된 까닭은 그의 철학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선교 열정 때문이었다. 1728년에 버클리는 대법원장 포스터의 딸인 앤과 결혼하자마자 아메리카로 가서 로드아일랜드의 뉴포트에 정착했다. 그는 그곳에 땅을 사서 화이트홀이라 이름 붙인 집을 짓고 본국에서 지원금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아메리카로 건너오기 전 1724년에 젊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교육을 위해 버뮤다에 대학을 세우려는 계획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그의 계획은 많은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왕은 대학지부 설립을 허가했고 캔터베리 대주교는 수탁자를 자임했다. 기부금이 쇄도했고 의회도 2만 파운드에 달하는 임시지원금을 인준했다.

버클리 자신도 아메리카 원주민 선교에 봉사하기 위해서, 당시 주교 직분이 보장한 1천100파운드의 수입을 포기하고 수입이 100파운드에 불과한 아메리카 지역 선교사가 되어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간 것이었다.

버클리는 본국의 지원을 기다리며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에 옮기고자 하였다. 그는 우선 자신의 돈으로 흑인 노예들을 사서 세례를 주었다. 브리티시 박물관에서 발견된 노예문서를 보면, 그는 세 명의 노예 즉 ‘필립, 안토니, 그리고 아그네스’라고 불리는 3명의 노예를 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당시 신식민지였던 아메리카에서 철학적인 주제 보다는 주로 노예 주인들을 설득해 원주민들과 흑인노예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기 위한 설교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1729년 10월에 행했던 한 설교에서 버클리는 노예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길 때 주인에게 더욱 순종할 수 있게 되며 그것이 노예 주인들에게 이득이라고 설교한다.

“노예는 오직 기독교인이 될 때에만 좀 더 나은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버클리, 1729년 10월 뉴포트 설교)

버클리는 노예제도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주된 관심이 노예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있다고 해도, 그것은 노예들의 자유나 해방에 초점을 둔 것 보다는 주인에 대한 순종과 복종에 초점을 둔 것이었다.

본국의 지원을 기다리며 버클리는 이렇게 뉴포트와 인근 지역에서 설교를 하러 다녔다. 또한 화이트홀에서 철학연구모임도 가졌다. 그는 미국의 여러 대학, 특히 예일대를 방문하기도 했다.

노예를 개종시킨 이유

버클리가 이렇게 아메리카에서 자신의 계획을 실천하고 있었지만 영국 정부는 약속한 지원금을 보내오지 않았다. 당시 총리였던 로버트 월폴은 영국의회가 약속했던 지원금이 그루지야 지방을 위한 지원비로 쓰자는 반대의견에 부딪치자 지원금을 보류해 버리고 말았다. 결국 버클리는 지원금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1731년에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 올 때 자신의 서재를 예일대의 도서관에 기증했다.

런던으로 돌아 온 버클리는 1734년 클로인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다시 철학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고 자유사상가들을 논박하는<알치프론, 또는 세심한 철학자>(Alciphron: or The Minute Philosopher)를 출간했다.

이동희
버클리가 다닌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

사실 버클리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인 20대에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철학적 작업으로 이미 철학적인 명성을 얻은 사람이었다. 그는 24살 때〈신시각론을 위한 시론 An Essay Towards a New Theory of Vision>(1709)을, 다음 해에〈인간지식의 원리에 관하여 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1710)을 출간해 철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28살에는 자신의 사상을 정리한 책인 <힐라스와 필로누스의 대화 Dialogues between Hylas and Philonous>(1713)를 출간했다.

버클리의 이론을 보면, 경험론이라기보다 관념론에 가깝다. 실제로 버클리를 관념론자로 분류하기도 한다. 버클리는 유물론을 비판하기 위해 물질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 철학적 노력을 경주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의식하는 것은 우리의 관념과 지각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로크의 전제에 따라 외부세계의 물질적 사물에서 받아들인 ‘감각 지각’인 관념을 받아들이지만, 로크와 다르게 우리 의식의 외부에 있는 물질적 사물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유물론’에 반대하며, 관념론을 주장한다.

그는 우리가 대상 또는 사물이라고 하는 것은 ‘감각적으로 지각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지각되는 것만이 존재한다!(Esse est percipi) 어떤사물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그 사물을 내가 보고, 느끼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그 사물을 그렇게 지각하지 못한다면, 그 사물은 적어도 나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물은 그 사물을 지각하는 정신 혹은 사유하는 존재자를 벗어나서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지각하지도 못하고 나의 정신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외적 실재의 존재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주관적인 것이 아닌가? 버클리는 우리의 정신과 독립적인 외적 실재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는 그러한 외적 실재의 존재는 신의 무한한 정신에 의해 지각되어 존재한다고 한다.

“나의 정신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한 나무는 무한한 신의 정신에 의해 지각된다.”

버클리는 “내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그 사물들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고 말을 한다. 그가 의심하는 것은 유물론자들이 주장하는 물질 또는 물질적 실체라고 하는 추상적 관념이다. 그는 ‘물체’는 신이 지각하여 우리의 정신에 영향을 줌으로써 우리 내부에서 발생하는 관념의 복합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버클리는 ‘물질’이라는 실체 개념은 ‘규정 없는 물체’라는 추상적 관념만을 의미할 뿐이며, 이는 생각할 수도 없고 지각될 수도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물질 그 자체는 없고, 물질에 대한 우리의 지각만이 있을 뿐이다.

“지각되는 것만 존재한다”

버클리는 자신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짧은 말로 간단히 요약하고 있다.

“나는 새로운 사상을 세우려고 하지는 않는다. 내가 하려는 것은 다만 지금까지 세상의 보통 사람들과 철학자들이 알고 있던 진리를 통일하고 이를 보다 더 밝은 빛 속에 드러내려 하는 것뿐이다. 이 진리의 첫 번째는 우리가 직접 지각하는 것들이 실재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직접 지각된 것들은 관념이고 관념들은 오로지 마음속에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생각을 합친 것이 결국 내가 내세우려는 주장의 핵심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버클리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 부인은 지금 안 보이는데(지각되지 않는데), 존재하지 않는 겁니까?"

한참 생각을 한 끝에 버클리가 대답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지각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 집사람은 존재하고 있다오.”

정말 주교다운 대답이었다.

“그러나 전능하신 신께서 지각하고 계시다면, 네스 호의 괴물도, 무시무시한 공룡도, 아담과 이브가 놀던 에덴동산도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요?”

“…”

버클리는 1752년 은퇴하여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에 입학한 아들을 보살피기 위해 옥스퍼드로 주거를 옮겼다. 그가 이룩한 학문적 업적과 그가 가진 온화한 성격으로 인해 버클리는 말년에 옥스퍼드 교수들과 주민들로부터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 1753년 1월 14일에 그는 아내가 읽어 주는 성경 말씀을 들으며 숨을 거두었다. 그는 유언장에서 자신의 신체가 부패하는 징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절대 장사를 지내지 말 것을 당부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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