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 난민으로 산다는 것

작은 인권이야기[55] 네툰나잉l승인2008.09.08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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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을 묻는다면, 나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대학시절이 될 것이다. 지난 1986년 당시 나는 랑군 대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멋지고 아름다운 꿈을 간직하며 학창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1988년 군사 독재를 타도하기 위한 역사적인 정치항쟁(8888로도 알려진)에 참여해야만 했다.

항쟁 기간 동안 나는 고향에서 학생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내가 위험에 빠질까봐 시위 참여에 반대했다. 그 당시 나는 19살이었는데, 아버지에게 “아버지, 기성 세대가 책임을 다하지 못해 우리가 자유를 위해 평화로운 대학 강의실을 떠나 투쟁하고 있어요”라고 과감히 항변했다.

우리가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지 벌써 20년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까지 새로운 민주 국가를 세울 수 없었고, 나 자신도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정치 망명자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부족하지만 다가오는 미래 세대를 위해 우리 시대에 군부 독재자를 타도하기로 굳게 결심했다. 또 그 누구보다 조국의 피할 수 없는 짐을 함께 지지 않는 사람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절대 잊혀지지 않는 일은 내가 성공회대 아시아 국제 NGO 대학원 석사 과정을 공부한 경험이다.(2007년 2월부터 2008년 2월까지)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항상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교수님들 덕분에 나는 학비뿐만 아니라 생활비까지 제공받을 수 있었다. 처음 전화로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알렸을 때 나는 무척 행복했고, 부모님 역시 나의 오랜 꿈이 실현된다고 생각하시고 매우 기뻐하셨다. 아버지는 1994년 내가 부모님 곁을 떠난 지 13년 만에 듣는 행운의 소식이라고 하시며 기뻐하셨다. 아버지 말씀에 크게 감격하여 나는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공부를 하면서 또 한편 정치적 활동을 계속하며 학위 수여식이 다가오자 나는 부모님들이 학위 수여식에 참석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그러나 나는 군부가 불법으로 규정한 NLD(버마 민족민주동맹) 총무였기 때문에 그것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것은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슴 아픈 일이었다.

난민에 대해 얘기해보면, 우리는 현재 한국에 와서 정착한 사람들인데 우리가 난민이든 아니든 외국에서 영원히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버마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회복하는 것이 쉽지는 않고 또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에 권력이 이양된 후에도 발전이 지체된 이렇게 가난한 나라를 재건하는 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얻은 경험과 기술이 미래 우리가 버마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하고, 일하며 공부할 때 우리의 조국 건설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역사가, 우리의 민주화 투쟁에 한국이 무엇을 어떻게 지원했는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우리의 고향을 위해 희생할 수 있었는지 입증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네툰나잉 NLD 한국지부 총무

네툰나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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