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게 하다

철학여행까페[46]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8.09.08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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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은 1711년 4월 26일에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 양가 모두 훌륭한 가문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법률가였지만, 그가 두 살 때 사망했다. 어머니도 법률가 집안 출신이었다. 어머니는 흄이 가족의 법률가가 되어 안정된 삶을 살기 원했다.

흄은 1726년에 에든버러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하지만 무미건조한 법학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3년 만에 법학공부를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와 철학적 문제에 집중하며 키케로와 같은 스토아 철학자들의 책에 몰두했다. 그는 이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이동희
법학에 관심없었던 흄


“많은 공부와 심사숙고를 거친 후 드디어 내게-이 때 18세가량이었다-전혀 새로운 사유의 세계가 열렸다. 나는 이 때 이 일에서 부터 그 어떠한 권위에 복종하기 보다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추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1729년에 흄은 심한 우울증을 앓게 된다. 그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 더욱 철학에 몰두했다. 그가 생각한 자가 치료는 날마다 억지로라도 두서너 시간씩 철학적 성찰에 몰입하는 것이었다.

그는 건강이 회복되자 브리스톨에 있는 한 설탕 상회에 상인보조로 취직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몇 개월 만에 상점 주인과 다투고 회사를 나왔다. 상점 주인과 다툰 이유는 그가 주인의 편지를 그냥 받아 적지 않고 주제넘게 문법에 맞추어 문장을 고치고 문체에 손을 대어 정리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앞으로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을 했다. 철학에 대한 꿈을 접고 다시 직장을 잡아 안정된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철학자로서 그리고 문필가로서의 성공을 위해 배고픈 삶을 인내하며 자신의 재능을 키울 것인가? 데카르트는 후자의 길을 걷기로 했다.

1734년에 그는 조용하게 철학적 문제에 몰두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갔다. 처음에는 랭스에 머물렀는데 생활비가 비싸 져 다음 해 라 플레슈 지역으로 옮겨 갔다. 라 플레슈는 데카르트가 공부했던 왕립 예수회학교가 있었다.

흄은 가끔 그곳을 둘러보며, 철학자의 꿈을 키웠다. 그는 3년 만에 다시 런던으로 돌아 왔다. 프랑스에 있으면서 그는 집필하기 시작한 <인성론>(A Treatise of Human Nature)을 영국에서 출판하고자 했다. 흄은 그 책으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1년 뒤에 간신히 책을 출간했지만, 반응은 차가웠다. 그는 의기소침해져서 자신의 철학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가까이 하지 않으려 하는 흉측한 괴물이 아닐까 스스로 의심했다.

“나는 나의 철학으로 인해 아무도 없는 적막감과 놀라움과 혼란에 빠진 나 자신을 보았다. 나는 내가 기이하고 흉측한 괴물일 것이라고 상상할 정도였다.”

그러나 흄은 이후 좌절하지 않았다. 1741년에 <도덕과 정치에 관한 평론집>으로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고, 이름도 세상에 알렸다. 이에 고무된 흄은 1744년에 에든버러 대학의 윤리학 및 정신철학 교수직에 지원하였으나 <인성론>이 자연신론, 무신론, 회의론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 성직자들이 반대함으로써 좌절되었다.

1752년에도 흄은 글래스고우 대학의 논리학 교수에 추천되었으나 또다시 흄의 무신론을 들먹이는 자들의 반대로 인하여 그는 취임하지 못했다. 흄은 그 사이에 후작의 가정교사로, 장군의 비서로도 일을 했다. 이런 일들을 하면서도 그는 <인간 지성에 관한 탐구>와 <도덕원리에 대한 탐구>같은 철학 작품을 썼다.

사서를 하며 영국사 집필

흄은 에든버러 변호사 협회 부속 도서관 사서직을 맡게 되면서 경제적 안정을 찾았다. 그는 이 도서관의 장서를 바탕으로 기원전 55년의 줄리어스 시저부터 1688년 영국 혁명에 이르는 <영국사>를 집필하고자 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가 ‘부도덕한 근대 문학’을 우선적으로 구입한다고 비난했다. 흄은 이러한 비난 이후에 연 40파운드의 급료마저 거절한 채, 1757년까지 사서로 일했다. 그가 급료도 받지 않고 사서로 있고자 했던 것은 3만여권에 달하는 이 도서관의 장서를 이용해 책을 집필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흄은 도서관 장서의 도움으로 <영국사>를 집필해 출간하였다.

이 <영국사>는 마침내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이 책을 통해 흄은 문필가로서 ‘영국의 가장 위대한 저술가’라는 평을 받을 만큼 크게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 책으로 그는 1천 파운드의 연봉까지 받게 되어 더 이상 돈에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다.

볼테르는 이 책에 대해 "아마도 언어로 쓰인 것 중에서 최고일 것"이라고 극찬했다. 이 <영국사>는 흄이 죽은 뒤에도 거의 100년간 베스트셀러이자 역사서로서 권위를 누렸다. 이런 흄의 업적으로 인해 오늘날에도 영국 도서관에서는 흄은 철학자가 아니라 역사학자로 분류되어 있다.

흄은 도서관 사서직에서 물러나 1763년에 파리 주재 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일을 한다. 이미 그는 파리 사회에 소문이 난 유명 인사였다. 뚱뚱하고 넓적하며 못생긴 스코틀랜드 사람이지만 그는 파리의 상류사회에 곧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스트라취라는 사람은 이렇게 적고 있다.

“그는 공작들의 아첨과 세련된 숙녀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그 당시 프랑스의 계몽운동 철학자들로부터 현인으로 우대되었다.”

흄은 본인이 스스로 평가한 대로 “온화한 성격과 자유로운 기질의 성품과 개방적이고 사교적이며 유쾌한 해학"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부담 없이 가까이 할 수 있었다.

이동희
흄과 루소
흄은 1766년에 파리를 떠나 영국으로 갈 때 루소를 데리고 갔다. 그의 가까운 친구인 베르데린 부인이 루소를 그의 보호 하에 영국으로 데리고 가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었다.

루소는 그의 이단적인 종교적 견해 때문에 많은 적들로부터 시달리고 있었다. 흄과 루소는 서로 좋아하고 또한 존경했다. 흄은 루소와 함께 살 집을 찾아 함께 지내기로 했다. 그러나 루소는 피해망상증이 있었다. 월폴이라는 사람이 루소에 대해 풍자문을 썼는데, 루소는 그것을 흄의 탓이라고 믿었다.

루소는 자신을 비난하려는 음모에 흄과 철학자들이 가담한 것으로 굳게 믿었다. 그는 프랑스의 친구들과 영국 신문에다 흄에 대한 신랄한 편지를 썼다. 흄은 루소에게 자신의 결백을 설득했지만 실패했다. 흄은 루소로 인해 더 이상 명예에 손상을 입지 않기 위해 달랑베르에게 사건의 전모를 적은 글로 써서 보내 출판하게 되었다.

루소는 1767년에 흄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프랑스로 돌아갔다. 사람 좋은 흄도 피해망상증에 사로잡힌 루소는 어찌할 수 없었다. 흄은 이 일이 있고 난 후 영국 국무성의 요청으로 국무성 차관으로 2년 동안 일을 한 뒤 고향 에딘버러로 돌아갔다.

그는 연간 1천파운드가 넘는 넉넉한 수입으로 성 앤드류 광장 가까이에 있는 뉴타운에 집을 지어 여생을 보내기로 했다. 그의 집이 있는 이 거리는 지금도 ‘성 데이비드의 거리’라고 불린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이라는 책을 개정했다. 그는 자연신론, 무신론이라는 비난을 걱정해 그 책을 생전에 출판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 책은 그의 조카가 출판을 했다. 흄은 65세의 나이로 1776년에 8월 25일에 고통 없이 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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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의 무덤
인간 인식과 회의론

흄이 철학에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인간의 인식능력과 관련된 흄의 회의론은 섣부른 자만에 빠질 수 있는 철학과 인간 이성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칸트가 평가한 대로 흄은 “철학이라는 배를 안전한 곳으로 끌고 오기 위해 그의 배를 해변(회의주의)에 정박시켜 놓았다.”

흄은 사상적으로 뿐만 아니라, 글쓰기로도 철학자게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깊고 어려운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명확성과 위트를 가지고 글을 쓰는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쇼펜하우어를 비롯한 러셀이나 에이어(A.J. Ayre) 같은 사람들이 흄의 글쓰기를 본보기로 삼았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데이비드 흄을 ‘현 시대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친구였던 애덤 스미스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나는 그의 생시에도 그리고 그의 사후에도 항상 그는 완벽하리만큼 현명하고 유덕한 사람이며, 또 어쩌면 인간의 단점까지도 용납할 사람으로 생각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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