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철학을 통해 혁명을 꿈꾸다

철학여행까페[49]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8.10.13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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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철학을 배우지 말고, 스스로 철학하는 것을 배우라!”

칸트가 강의시간에 학생들에게 자주했던 유명한 말이다. 칸트는 아침 5시에 일어나 강의 준비를 하고, 오전에 7시에서 10시 사이에 강의를 했다. 칸트는 이런 일정을 지키며 평생 동안 규칙적인 생활을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이동희
칸트의 식사풍경

노년에 그가 매일 아침 정각 5시에 일어나고, 또한 점심 식사 후에 목적지인 프리드리히스베르크성을 향해 매일 산책을 한 것은 유명하다. 산책을 하는 칸트를 보고 사람들이 시계를 맞추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신빙성은 별로 없다. 왜냐하면 칸트의 점심시간이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칸트는 점심시간에 사람들을 초대해 즐겼고, 사람들이 많을 때에는 저녁 6시 까지 점심시간을 즐겼기 때문이다.

규칙적인 생활 어떻게 유지?

한 친구는 칸트의 일과에 대해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칸트는 여름이나 겨울이나 매일 아침 정각 5시에 일어난다. 그의 하인은 정확하게 4시 45분에 칸트의 침대에 가서 그를 깨우는데 그의 주인이 일어나기 전에는 침대를 떠나지 않았다. 칸트가 잠이 덜 깬 얼마 동안은 하인에게 자기를 좀 조용히 놓아두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이 하인은, 칸트가 아무리 그런 부탁을 하더라도 자신을 더 오랫동안 침대에 머물러 있게 해서는 안 된다는 단호한 명령을 받았다. 때문에 하인은 그가 시간에 맞추어 일어날 수 있도록 계속 흔들어 깨웠다.”

칸트를 깨웠던 하인은 군인 출신이라 고지식하게 칸트의 명령을 지켰던 것 같다. 하인의 도움이 있었지만, 칸트는 규칙적인 생활이 흐트러지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언젠가 한 귀족이 칸트를 시골을 두루 가로 지르는 마차 산책에 초대한 적이 있었다. 마차 산책이 너무 길어지자 칸트는 무척 불안해 안절부절 했다.불만에 가득 차 집에 돌아오자 마자 칸트는 자신의 생활규칙을 하나 더 만들었다.

“어느 누구의 마차 산책에도 절대 따라 가지 말 것.”

이렇게 생활의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고자 했던 칸트가 매번 나가던 산책을 두 번이나 나가지 않은 일이 있었다. 한번은 루소의 책을 읽다가 산책시간을 놓쳐 버렸다고 한다. 다른 한번은 프랑스에서 혁명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서 산책을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 두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진짜 칸트가 그랬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칸트가 루소의 책을 읽고 엄청난 충격과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칸트는 공부방에 루소의 초상화만을 걸어 놓고, 산책길에 루소의 에밀을 들고 다녔다.

또한 칸트가 프랑스 혁명의 과정을 예의 주시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칸트는 프랑스의 시민 혁명의 이상과 같이 했다. 그러나 그가 살던 프러시아는 그러한 이상을 아직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완고한 봉건적 절대주의가 지배하던 국가였다.

대신 칸트는 철학을 통해 철저한 혁명을 꿈꾸었다. 칸트가 철학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혁명은 무엇일까?

이동희
칸트의 초상화
철학을 통해 혁명을 꿈꾸다


임마누엘 칸트는 1724년 4월 22일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왕의 산’ 이라는 뜻의 쾨니히스베르크는 이름만 보면 동독의 어느 곳에 있는 도시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쾨니히스베르크는 폴란드를 넘어 발트해에 접해 있다. 지금은 러시아 연방의 도시 칼리닌그라드라 불린다. 지금은 러시아의 한 도시지만, 칸트가 살았던 쾨니히스베르크는 1701년 프리드리히 1세가 수도를 베를린으로 옮기기 전까지 프로이센의 수도였다. 칸트는 이 쾨니히스베르크를 벗어나지 않고 죽을 때 까지 이 도시에서 살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칼리닌그라드는 칸트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는 아직도 쾨니히스베르크로 기억된다.

칸트의 아버지는 말의 안장을 만드는 마구상인이었다. 부모 모두 루터교 경건주의의 독실한 신자였다. 칸트는 어머니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회상했다. 칸트의 어머니는 당시 여성으로는 상당히 교육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칸트는 노년에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추억한다.

“나는 어머니를 결코 잊을 수 없다. 무엇보다 그 분은 선(善)에 대한 첫 번째 씨앗을 나에게 심어 주셨고, 가꾸어 주셨다. 그 분은 나의 가슴을 자연에 대한 감명으로 열어주셨다. 그 분은 나의 이해력을 깨워 주셨고, 내가 계속 발전할 수 있도록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칸트는 어머니를 따라 쾨니히스베르크 교회를 다녔다. 그 교회의 담임목사는 슐츠였다. 슐츠는 나중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총애를 받아 신학교수, 프리데리치아눔의 교장 등 중요한 모든 관직을 섭렵한다.

그는 교회에서 수줍은 어린 소년 칸트를 맘에 들어 했고, 그 소년을 프리데리치아눔 김나지움 학교에 보내 주었다. 그리고 그는 무료로 땔감을 주는 등 어려운 칸트 집안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칸트는 경건주의 학교에서 8년 동안이나 수학을 했지만, 경건주의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칸트는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16살이 되던 1740년에 쾨니히스베르크대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신학부에 입학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확실하지 않다. 대학 시절에 그가 가장 영향을 받은 인물은 크누첸 교수 였다. 그의 영향으로 그는 수학과 물리학에 흥미를 느꼈으며, 크리스티안 볼프에 관심을 기울였다. 1744년에 칸트는 최초의 책을 썼는데, 주제는 운동력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그는 학자의 길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는 대학에서 일자리를 얻는 데 실패했고, 대신 가정교사직을 구해 9년 동안 일했다. 1755년에 친구의 도움으로 대학에서 학위를 마치고 대학강사가 되었다. 그는 대학 강사로서 15년 동안 지냈다. 이 시기에 그는 대학과 쾨니히스베르크 시에서 강사와 저술가로서 점점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쉽지 않았던 대학교수직

그러나 그가 소원했던 교수직은 쉽게 얻을 수 없었다. 크누첸 교수가 죽은 뒤에 자리가 빈 철학 원외 교수직을 얻으려 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1764년에 프로이센 정부는 칸트에게 시학 교수 자리를 제의했지만, 칸트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는 왕의 대관식이라든지 생일날을 위한 축가를 짓는 것과 같은 일은 자기가 할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1770년에 칸트는 마침내 소원하던 교수직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새롭게 수학교수 자리가 마련되어 그 자리를 이제까지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담당하던 교수가 맡게 되고, 철학교수 자리가 비게 된 것이다. 칸트는 46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철학 교수가 된 것이다. 이제 칸트는 철학의 혁명을 이루기 위한 작업에 몰두한다.<다음 호에 계속>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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