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주의 안에서 진행되는 민주사회주의 경로는?

환호와 위기 속에 전개되는 베네수엘라 혁명 조희연l승인2008.11.03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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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연 교수의 카라카스 국제심포지움 참관기

어느 날 갑자기 한 통의 영어 이메일이 도착하였다. 한국에도 이미 2권의 책과 몇가지 보고서들로 출판되어 국내 시민사회 진영에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베네수엘라 혁명의 수도 카라카스에서 열리는 국제심포지움에 발표자로서 공식적으로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아마도 누구나 이런 이메일을 받는다면 큰 놀라움과 약간의 흥분에 사로잡힐 것이다. 주민평의회, 노동자공동경영, 농촌협동조합, 내생적 발전지대, 민중권력학교, 사회경제적 생산기업, 소액금융, 대안적 지역경제협력 모델(ALBA) 등을 비롯하여 다양한 현대식 실험을 통해 ‘21세기형 사회주의’를 새롭게 창출하고 있다는 찬사에서부터, ‘석유포퓰리즘’(oil populism)이자 ‘돈키호테식 권위주의 체제’라고 하는 비난에 이르기까지 좌우 모두에서 어쨌든 관심을 받고 있는 베네수엘라를 직접 방문한다는 흥분과 놀라움 속에서 나는 초대를 기꺼이 수락했다.

인도 뭄바이,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하여 26시간의 장시간 여행을 거쳐 카라카스에 도착했다. 공항을 나오는 우리를 바로 건너편 산 정상의 ‘란치토’라고 하는 다닥다닥한 주거촌과 ‘차베스와 함께 사회주의혁명의 길로’라는 플래카드가 환영하였다. 이렇게 해서 세계 자본주의가 벼랑 끝까지 몰렸던 것처럼 보였던 지난 10월 둘째 주 베네수엘라 계획개발부와 미란다 국제연구소가 주최한 국제정치경제학자 대회인 ‘세계경제위기에 대한 남측의 대응’ 학회와 베네수엘라 탐방의 여정은 시작되었다.

베네수엘라 혁명의 특징=자기도 못사는 후진국 주제에, 미국의 인디언촌이나 캘리포니아의 홈리스 빈민들에게 1억 갤런의 난방유를 제공하여 겨울을 따뜻한 겨울을 나게 하고, 식료품 가게를 보조하고, 저가주책을 공급하고, 무상의료를 제공하는가 하면 멕시코를 포함하여 남미의 ‘기적 미션’이라는 이름으로 무료 개안수술을 남미 전역에 제공하고, 쿠바에 20억불의 원조를 제공하는(물론 쿠바의사들이 대거 베네수엘라에서 무료의료봉사와 교환이 될 수도 있지만)가 하면 민영화라는 거대한 세계적 흐름에 맞서 ‘CAM TV’라고 하는 전화회사나, ‘H.J. Heiz 토마토’ 가공회사를 국유화하는 등 현대판 사회주의 실험을 하고 있는 차베스. 이 차베스와 베네수엘라 좌파의 실험을 어떻게 볼 것인가. 아니 이러한 실험 속에서 우리는 한국의 진보주의, 좌파, 사회주의의 어떤 통찰력과 상상력을 끌어낼 것인가.

“차베스 혁명 모델은 노동자평의회, 사회적 경제, 석유 등 중요자원의 국유화 등 다양한 사회주의적 실험들을 하고 있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힘을 형성되고 발전되도록 하고, 그것을 제도화하는 주민평의회를 설치했다는 점이다.

주민평의회는 초기에는 ‘볼리바리안 써클’에서부터 시작하여 자발적인 아래로부터의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2006년에는 주민평의회를 지원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을 통해서 재정적인 지원도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5만여개에 이르는 마을단위 중에서 1만5천개 내외의 주민평의회가 만들어져 있다. 도시에서는 200~400가구당, 인구수가 적은 농촌에서는 20~30가구 내외를 단위로 하여 주민평의회가 만들어진다. 이 경계 내에 속하는 지역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최종적인 결정권을 주민평의회, 즉 주민들의 집단적 권력이 가지고 있는 셈이다.

베네수엘라 계획개발부와 미란다 국제연구소가 주최한 국제정치경제학자 대회 '세계경제위기에 대한 남측의 대응’장면.

작은 경우 5명 내외의 대표를 선출한다. 주민평의회 산하에는 각 주제별로 특별위원회나 특별팀이 만들어지게 된다. 지역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일들-예컨대 물과 관련된 문제, 교육, 토지 문제, 의료 문제 등-에 대해서 주민평의회가 특별팀을 만들어서 안을 만들고 추진하는 역할을 한다. 정부에서 지원되는 돈은 주민평의회의 결의나 그 위임에 의해서 사용하며, 그때그때 지역주민의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프로젝트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이 특별프로젝트에 관한 예산은 중앙정부로부터 수령 받을 수 있다. 중앙정부에서 오는 돈은 대표성이 있는 사람의 명의로 통장을 개설하여 수령하게 된다. 재정을 어떻게 꾸리는가를 둘러싸고 주민들의 의견을 묻는 ‘재정포럼’이 개최되기도 한다. 주민평의회에서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지면 실무위원회가 만들어져서 실무적인 처리를 하게 된다.

주민평의회는 특정한 공간에서 주민들의 최고권력체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왕왕 지방정부 혹은 지방자치단체와 갈등의 소지도 있다. 보수적인 지방자치단체들의 경우 갈등의 소지가 커지고, 진보적인 지방자치단체들의 경우는 협력적인 분위기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주민평의회는 기존의 국가기구, 관료기구와는 다른 통로로 대중들이 직접 의사결정을 하고 대중들이 경제적 사업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민중들이 기존의 국가기구에 종속되는 방식이 아니라 민중들의 자발적인 조직화와 그것의 제도화를 통해서 기존의 국가기구를 사회적 힘에 기초하여 견제하고 ‘상대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하는 점이다. 이 점은 베네수엘라 혁명의 한 특징이기도 하다.어떤 의미에서 국가 내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에 반하는(in and against the state)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Marta Hernecker, Sandino)

베네수엘라 혁명의 특수성과 일반성은 소위 ‘피티독재’ 없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경로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 시장주의의 프레임 속에서 진행되는 사회주의. 그 경로의 딜레마는 있지 않을까. 의회주의와 시장주의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어떤 경로가 가능한 것일까. 대중의 역동성으로 ‘포획’을 통제하는 것, 일종의 대중의 힘에 의한 ‘이중권력’적 상황을 유지하고 확대해가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대중의 역동성과 결합되는 한국적 모델은 무엇일까.

남미 좌파의 위기=“남미 좌파들은 최근 여러 나라에서 집권에도 이르고 있고 변화의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지만 오랜 동안 큰 위기 속에 있었다. 그 위기는 3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이론의 위기, 둘째는 프로그램의 위기, 셋째는 유기적 위기(organic crisis)이다. 먼저 이론의 위기는 다시 3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먼저 남미의 좌파들은 스스로의 독자적인 사고체계를 구성하지 못하는 역사적 무능력을 드러내었다. 여러 가지 사회주의적 실험에 대한 정력적인 연구를 수행할 수 없었다. 성공의 사례 뿐만 아니라 특별히 실패의 사례에 대한 심도있는 분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장 심각한 이론의 위기는 20세기 후반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론의 결여이다. 전자정보혁명을 겪으면서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있는 자본주의, 지구화와 금융적 전쟁을 겪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론이 약했다.

다음으로 크게 둘째, 프로그램의 위기(Programmatic crisis)를 들 수 있다. 남미 좌파가 신뢰성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모델들이 줄줄이 실패한 상황에서 물론 변화를 위한 새로운 프로그램을 구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좌파세력은 대안적 정치세력으로 성공할 수 없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남미의 좌파들은 일정 지역에서는 예컨대, 지방정부에서는 권력을 잡은 경우가 많았다. 이를 통해서 대안적인 프로그램을 선보일 수 있었으나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경우가 많다.

셋째, 유기적 위기를 들 수 있다. 이는 새로운 도전에 부응하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가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과거의 구조, 습관, 전통, 정치수행 방식은 현재 세계가 제기하고 있는 도전에 부응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사회적 현실 그 자체가 대중적인 새로운 사회주의적인 정치적 행위자들에게 만들어내는 새로운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점에 전환이 필요하다.

볼셰비키 모델을 ‘복사’하고자 하는 태도가 이러한 유기적 위기의 중대한 원인이다. 볼셰비키 모델의 성공으로 사회주의는 현실적인 것이 될 수 있었다. 레닌적 정당은 20세기 초의 정세 속에서 사회적 엔지니어링(social engineering)의 대단한 혁신적 모델이었다. 그러나 이 모델을 무조건 전 세계 어디에서든 보편적 모델로 적용할 수 있다고 하는 사고가 역으로 많은 문제를 낳았다. 100년이 넘는 동안의 변화, 새로운 변화들이 가져온 새로운 도전들에 부응하는 새로운 전환과 혁신이 필요하다.”(Marta Harnecker. Rebuilding the Left).

국제정치경제학 대회에서=베네주엘라 차베스 대통령과 엘 트루디 계획개발부 장관, 페레스 에쿠아도르 경제정책 장관을 비롯한 정부 관계자들과 라틴아메리카, 북미, 유럽, 아시아 등에서 다수의 좌파 경제학자들과 사회운동가들이 참석했다. 그 중에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마이클 레보비츠(캐나다), 마르타 하르네커(칠레), 사미르 아민(세네갈), 팻 드바인(영국), 에릭 투셍(벨기에), 알 캄벨(미국), 클라우디오 카츠(아르헨티나) 등도 포함돼 있었다.

이번 학회에는 마르크스주의, 좌파 케인스주의, 제3세계주의 등 다양한 입장에서 대응 방안들이 발표되었지만, 전체 흐름은 첫날 차베스 대통령의 무려 2시간 동안의 열변에서 제시된 이른바 ‘남측의 대응’으로 표현되는 제3세계주의가 주도했다고 할 수 있다.

차베스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위기 개념을 인용하면서 현재의 세계경제위기를 “이미 낡은 신자유주의가 죽었음에도 새로운 사회주의 체제가 아직 탄생하지 않은 상황에서 빚어진 사태”로 설명했다. 당면 과제로 IMF와 세계은행의 철폐, 달러 지배체제의 폐기, 남측이 연대하여 자신들의 외환보유고를 자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남측 은행’(Banco del Sur)의 설립을 촉구했다. 페레스 에쿠아돌 경제정책 장관과 에릭 투생이 제안한 외채의 심사 및 선별 무효화(Debt Audit)는 이와 같은 차베스의 제안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사미르 아민은 최근의 세계경제위기가 자본주의의 종말보다는 네오파시즘의 대두, 북측이 위기의 비용을 남측에 전가하기 위한 군사력 사용과 이에 따른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경계하면서 1950년대 제3세계의 ‘반둥 회의’ 정신을 오늘날 세계경제위기 국면에서 새롭게 발견할 것을 촉구했다.

반면 마이클 레보비츠는 최근 심각한 위기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저절로 붕괴되고 탈자본주의로 나아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이를 위해서는 주체의 적극적 대응이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이 심포지움의 논의에는 한국경제도 직면하여 고민하게 되는 여러 가지 핵심 주제들이 논의되었다. 현 금융위기의 대안적 극복방법은 무엇인가. 이 위기는 신자유주의의 위기이며 신자유주의적 기조는 역전될 것인가. 이 위기가 미국패권의 위기와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위기와 맺는 관계는 무엇인가 등 빠뜨릴 수 없는 쟁점들이 주장되고 토론되었다.

마지막 성명서에서는 이번 금융위기에서 가장 큰 피해자로 부각되고 있는 남미의 사정들이 반영되어 IMF적 금융질서로부터 남미의 경제적 자율성을 담보하는 기제로서의 ‘남미은행’ 나아가 ‘남반부 은행’의 독자적 성립, 지역적인 완충기제로서의 남미의 공통화폐 창출 및 탈미국화된 경제적 통합질서의 가속화 등이 담겨져 있었다.

미국과 IMF의 투기적 금융질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금융질서(finnancial architecture)를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공감되면서, 그 구체적인 방도가 과연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하는 점이 열띤 토론의 쟁점이 되었다.

토론과정에서 우리는 한국을 포함하여 동아시아의 전반적인 지적 지형과 남미의 지적 지형 간의 확연한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금융위기에 대응하는 우리의 논의가 미국적 질서를 전제로 하는 ‘친미적 적응주의’가 대세를 이루기 때문에 뉴욕발 금융질서를 ‘국민경제와 민족국가 전체의 위기’로 인식하고, 어떻게 이 위기적 상황에서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인가하는 식으로 접근되는 데 반하여 이곳에서의 논의에서는 부실 금융기관에 쏟는 거대한 돈들이 결국 ‘투기적 금융자본에 대한 복지사업’이고 이 위기는 신자유주의적 시장중심주의의 파산이며 미국의 거대한 경제적 패권을 극복하는 계기로 사고되어야 한다는 논의로 전개되었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조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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