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제로

책으로 보는 눈 [66] 최종규l승인2008.11.10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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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아기와 씨름하면서 잠이 들기 어려웠는지, 한낮쯤 되니 졸음이 확 밀려들면서 한 시간 남짓 까무룩 잠이 듭니다. 그동안 옆지기는 밀린 기저귀를 빱니다. 햇볕이 따사로운 때를 그냥 넘기기 아깝다면서. 이제 쉰 날 가까이 되고 보니 옆지기도 어느 만큼 집안일을 거들 수 있습니다. 옆지기가 빨래하는 사이 아기는 똥을 왕창 눕니다. 물을 뎁혀서 엉덩이와 잠지를 씻고, 아기 바람씻이(풍욕)를 합니다.

아기한테 젖을 물리고 눕히니 어느새 두 시가 넘는 때. 날마다 똑같이 되풀이되는 일이지만 하루가 짧습니다. 날마다 조금씩 무거워지고 무럭무럭 자라는 아기를 보면서 새로운 하루가 이렇게 찾아오는구나 하고 느끼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이 느슨해지면 하루 내내 무엇을 했는지 종잡지 못하는 가운데 저녁을 맞이하게 됩니다. 차분하게 마음 추스를 새 없는 가운데, 김수정 님 만화 <미스터 점보>를 봅니다. 지난 1984년 4월부터 1985년 12월까지 ‘학생과학’에 싣던 작품으로, 학교성적은 ‘0’이지만 끊임없이 새 발명품을 만들어 내려고 머리를 쓰는 아이가 나옵니다.

어느 날, 어머니를 도와 마늘을 빻으면서 묻습니다. “김치 담그는 데 몇 분 정도 걸려요?” “몇 분이라니? 한나절이다.” “한나절이나요? 에이, 그럴 바에야 차라리 김치회사에서 사다 먹죠?” “집에서 할 수 있는데 왜 비싼 걸 사서 먹니? 값도 값이지만, 집집마다 특색있는 김치맛이 있지 않느냐.”(141쪽)

아기가 불러서 만화책을 집던 손을 자주자주 놓습니다. 만화책 한 권을 다 읽어내기까지 꽤 여러 시간이 걸립니다. 아기 돌보기도 해야 하지만 우리 두 식구 밥도 먹어야 하고, 어질러 놓은 채 엄두도 못 내지만 방바닥이라도 훔쳐야 하고, 뭐도 하고 뭣도 하며 내처 돌아치게 됩니다.

다시 만화책을 펼칩니다. 학교 공부에는 젬병일 뿐 아니라 도무지 재미가 붙지 않아 시험을 코앞에 두고도 책상맡에서 쿨쿨 자기만 하는 ‘제로’. 수학과 과학은 늘 ‘0점’을 받으면서도 수학과 과학을 써서 이웃들한테 도움이 되는 발명을 하려고 애쓰는 제로. 좋은 생각으로 온몸을 바쳐 여러 날 동안 잠과 밥을 잊으면서 발명에 빠지는 제로한테 둘레 어느 누구도 도와주는 일이란 없습니다. 제로가 무언가 한 군데 잘못을 해서 영 글러먹게 될 때에도 그 모자람을 알려주는 이가 없습니다.

책을 덮으면서 생각합니다. 우리 발명소년 제로한테 학교교육이란 무엇일까 하고. 학교는 제로한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가 하고. 학교를 다니는 모든 아이한테 다 다른 가르침을 베풀기란 어려울 수 있을 테지만, 다 다른 아이가 다 다른 자기 길을 찾으면서 다 다른 자기 배움을 꾸려 나가도록 이끌거나 손을 내밀어 줄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하고.

세상 모든 일은 ‘0’부터라고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세상을 헤쳐 나가려는 제로한테 우리들은 “넌 참 엉뚱하다” 하는 말이 아니라 “그래, 네 길을 가려면 이렇게 하면 더 낫겠구나”하는 도움말을 들려주어야지 싶은데, 모두들 제 밥그릇 챙기기에 몹시 바쁩니다.


최종규 1인 잡지 <우리 말과 헌책방> 내는 사람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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