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을 찬양한 자연철학자 셸링

철학여행까페[53]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8.11.10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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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년에 15살 먹은 어린 학생이 튀빙겐 대학교 신학부에 입학을 했다. 원래 법률적으로 대학교육은 18살 때부터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소년은 특별한 허가를 받고 이 대학에 입학을 한 것이다. 그것도 장학금까지 받고.

이 소년은 11살 때 이미 전 과목을 통달해 더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려보낼 정도로 천재였다. 그는 튀빙겐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이미 여러 가지 언어에 통달했다.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또는 아라비아어로 시를 쓸 줄 알았다. 그가 쓴 시는 어설픈 것이 아니라 잡지의 편집장이 욕심을 내어 실을 만큼 뛰어난 것이었다.

조숙한 천재

이 조숙한 천재가 바로 셸링이다. 셀링은 튀빙겐 대학에 입학해서도 빛을 냈다. 20살이 되기 전에 이미 철학 저서들을 저술했다. 이 튀빙겐 대학교에는 독일 낭만주의 대표적 시인인 횔덜린과 철학자 헤겔이 다니고 있었다.

이동희
셸링이 입학한 튀빙겐 신학교 기숙사

이 두 사람은 셸링과 한 방을 같이 쓰게 된다. 이 두 사람은 셸링 보다 몇 년 더 선배였지만 셀링과 서로 철학적 문제들을 공유하며 토론을 했다. 셸링은 이들 보다 나이가 어렸지만 이미 철학자로서 이름을 알리며 이들 보다 훨씬 앞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셸링은 당시 최신 철학인 칸트와 피히테의 철학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16살 때에 이미 요한 슐츠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해제’를 연구했었다. 그는 튀빙겐 대학에 들어 와서 칼 임마누엘 디쯔를 통해 칸트철학에 더욱 친숙해 질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피히테가 등장했다. 셸링은 피히테 철학을 우상화하고 신봉할 정도로 영향을 많이 받았다.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셸링은 1793년 6월에 이미 피히테를 알았던 것 같다. 그 때 피히테는 취리히로 떠나는 여행 도중에 튀빙겐에 잠시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철학의 개혁자이자 그 때까지는 아직도 칸트의 충실한 제자이자 추종자였던 피히테는 그곳에서 커다란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피히테와 셸링의 결정적인 만남이 있었던 것은 1794년 5월이었다. 교수취임을 하기 위해 피히테는 취리히에서 예나로 길을 떠나는 중에 튀빙겐을 들렀다. 그는 청강자들에게 그가 새롭게 창출한 철학적 체계의 요강과 전망들에 대해서 강의했다. 이것은 뒤에 <전체 지식론의 기초>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셸링은 이 책의 영향을 받아 <철학일반의 한 가지 형식의 가능성에 관하여>라는 책을 썼다. 이 때 그의 나이가 19살이었다. 그는 이 저작을 피히테에게 보냈다. 셸링은 피히테 철학에 대한 감격을 그 사이 친구가 된 헤겔에게 이렇게 편지로 써 보낸 적이 있다.

“피히테는 철학을 정점으로 올릴 것이며 그 앞에서 이때까지의 칸트주의자들 대부분은 현기증조차 느끼게 될 것이다… 내가 새로운 영웅, 피히테를 진리의 땅에서 환영하는 최초의 사람들 중 하나라 해도 …충분히 행복하다.”

피히테 철학에 대한 감격은 헤겔도 마찬가지였고, 셀링의 또 다른 친구 시인 횔덜린도 마찬가지였다. 횔덜린은 피히테를 “인류를 위해 싸웠던 한 타이탄족으로” 언급할 정도였다. 그들에게 피히테는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구현하는 새로운 철학처럼 보였다.

피히테는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받아 1793년에 이미 <프랑스혁명에 관한 공공의 판단교정을 위한 기고문>이라는 논문과 <유럽의 영주들에게 그들이 이제까지 탄압했던 사상의 자유에 대한 반환을 청구하다>라는 논문을 쓴 적이 있다.

이동희
셸링
자유의 삼색기를 보다

그들은 피히테 철학 보다 더 먼저 이웃나라인 프랑스 혁명 소식을 들었다. 튀빙겐은 프랑스와 맞닿은 국경지대에 있어 프랑스 혁명 소식을 빨리 접할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 사람들은 전제주의를 전복시켰다. 권력은 민중의 손으로 넘어왔다. 셸링과 헤겔을 비롯한 독일청년들의 마음에는 이미 자유의 삼색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혁명군대가 독일에 진입해 들어 왔을 때, 사람들은 환호했고 환영을 했다. 그들은 열망해 마지않던 혁명을 몰고 왔다. 헤겔은 만년에 그가 젊은 시절에 받은 커다란 인상을 회고하면서 이 혁명을 “찬란한 일출”이라고 불렀다.

당시 튀빙겐 신학교 출신이었던 칼 라인하르트는 슈바벤 지역 신문에 소상하게 바스티유 함락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이념에 동조해 프랑스로 가서 거기서 프랑스 시민권을 얻었다. 나중에 그는 혁명 대사가 되었고, 한때는 공화국의 외무장관이 되기도 했다.

전해오는 유명한 전설에 의하면, 셸링과 헤겔은 프랑스의 혁명 소식을 듣고 튀빙겐의 한 초지에다 자유의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 전설적인 이야기에 대해 과장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셀링의 아들도 이 이야기에 대해 의혹을 나타냈다.

셀링과 헤겔이 자유의 나무를 심었던지 아니면 심지 않았던지 간에 중요한 것은 그들이 프랑스 혁명 이념에 동조했다는 것이다. 셸링은 프랑스 혁명가인 마르세이유의 노래를 독일어로 번역한 사람으로 추정된다.

셸링과 헤겔은 튀빙겐 대학 내에 정치적 클럽을 결성해 금서들을 읽고 정치적 뉴스들을 이야기하며 종교, 혁명, 고향과 인류의 운명에 대한 논쟁적인 대화들을 나누었다. 그리고 술을 마시며 셸링이 번역한 마르세이유의 노래를 불렀다.

정치적 클럽의 조직과 와해

이 정치적 클럽은 한 밀고자에 의해 해산이 되었다. 슈튜트가르트의 국립주요기록보관서에서 발견된 문서에는 당시 정치적 클럽의 리더였던 셸링과 그의 친구 베첼을 탄핵하는, 대공 앞으로 보내진 서한이 있다. 이 서한에 따르면, 이 학생 그룹은 “프랑스인이 향유하고 있는 것과 같은 자유와 평등을 이 지역 안에 들여오고자 하는 전체적인 의도를 가지고 운영되어 왔다”고 한다.

이 정치적 학생 그룹은 내부 밀고자의 협박에 못 이겨 해산을 하고 만다. 셸링과 베첼 두 사람은 내부 밀고자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 그에게 배반해서 제발 불행한 일을 만들지 말라고 부탁을 했다. 그리고 그에게 모임 전체를 해체해서 없애 버리겠으며 그러한 모임을 영원히 갖지 않을 것을 엄숙하게 서약을 했다. 그러나 밀고자는 그러한 약속을 깨고 대공에게 밀고를 한 것이었다.<다음 호에 계속>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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