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를 상징했던 여성, 카롤린네

철학여행까페[54]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8.11.17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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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은 밀고를 받았지만, 커다랗게 문제 삼지는 않았다. 대학을 방문해 셸링을 비롯한 학생들을 공개적으로 책망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했다.

셸링은 1795년에 튀빙겐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 어린 남작의 가정교사 생활을 하면서 그는 라이프치히에 머물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당대의 자연과학 이론을 접할 수 있었다. 화학, 전기학, 생물학, 의학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면서 셸링은 피히테 철학과 멀어지기 시작하였다.

자연철학자 셸링

그는 <자연철학의 이념>(1797)과 <세계혼>(1798)에 대한 책을 썼다. 이 논저들을 통해 셸링은 피히테의 ‘자아’ 개념이 충분히 다루지 못한 ‘자연’ 개념을 다룬다. 셸링은 이 두 논저로 인해 23살의 나이로 예나대학의 원외교수로 초빙을 받았다.

셸링을 추천한 사람은 거장 괴테였다. 괴테는 셸링의 <세계혼>을 읽고 매우 매혹되었다. 그는 예나에 있는 실러 집에서 우연히 셀링과 만나 대화하며 젊은 철학자의 가능성에 대해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동희
예나 도시 전경

셸링은 23살의 약관의 나이로 대학 강단에서 강의를 하였다. 예나에서 셸링이 행한 자연철학에 대한 강의는 슐레겔 형제를 비롯하여 티엑크 및 노발리스와 같은 낭만주의 시인 및 사상가들과 밀접한 교우관계를 갖게 된다.

낭만주의자들에게 자연은 그들의 혼돈한 상상력의 탄생지가 아니라 절대적 실재였다. 낭만주의자들의 자연 숭배는 곧 바로 셸링을 주목하게 만들었다. 자연은 복종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경배의 대상이었다. 시와 예술은 자연과의 근원적 조화를 파괴하지 않고 자연의 비밀을 천명하는 수단이다. 시인과 진정한 자연철학자는 동일한 언어, 자연 자체의 언어를 말한다고 생각하였다.

셸링은 낭만주의들과 교유하면서 자기보다 12년 연상인 카롤린네와 결혼을 했다. 카롤린네는 처음에 뵈머와 결혼을 했다가 사별하고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의 부인이 되었다가 다시 셸링의 부인이 되었다.

그녀는 프랑스 혁명을 지지해 감옥에 갇힐 정도로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여성이었다. 슐레겔은 감옥에서 나와 어려운 처지에 빠진 카롤린네를 도와주었다. 카롤린네는 슐레겔의 구애를 거절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신을 구해 준 고마움으로 마지못해 그와 결혼을 했다.

그녀는 낭만주의자들 모임에서 셸링을 만났다. 셸링은 슐레겔의 집에 거주했다. 그 인연으로 셸링과 카롤린네는 가까워졌고, 카롤린네가 셀링에게 훨씬 더 적극적으로 구애를 했다. 두 사람의 사귐은 예나에서 커다란 스캔들이었다. 낭만주의 서클은 해체되었다.

1800년 5월에 셸링은 카롤린네와 함께 잠시 예나를 떠나 밤베르크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다시 예나로 돌아 왔다. 예나로 돌아 온 셀링은 더욱 철학에 몰두했다. 그는 철학을 새롭게 혁신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생각으로 그는 스위스 베른에서 가정교사생활을 하는 친구 헤겔을 불러 들였다.

헤겔은 어린 친구 셸링이 승승장구하는 동안 가정교사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우울증에 걸릴 정도로 실의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1801년에 헤겔이 예나로 왔다. 유럽의 정신적 세계를 호령할 두 젊은 철학자는 철학의 혁신을 목표로 공동 작업을 진행했다. 두 사람은 공동으로 <비판적 철학 잡지>를 발간했다. 

이동희
괴테와 실러의 동상
헤겔과 대립하다


헤겔은 학위논문으로 <피히테와 셸링 철학 체계의 차이>를 썼다. 이 논저에서 헤겔은 셸링과 피히테가 공동으로 작업하는 것 같지만, 이미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음을 예리하게 분석해 보여 주었다.

셸링은 1803년에 카롤린네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뷔츠부르크 대학의 정교수로 초빙받아 갔다. 셸링은 1806년에 뮌헨의 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1820년까지 그는 교수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저술 활동은 계속해 나갔다. 특히 1806년에 그는 피히테 철학을 개선할 요량으로 쓴 <개선된 피히테 철학과 자연철학의 진정한 관계에 대한 서술>을 발간했다. 이 책으로 인해 피히테와 셸링간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된다.

셸링은 강의는 하지 않았지만 학문적 저술 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그러다 그를 실의에 빠뜨리는 사건이 생긴다. 셸링의 부인 카롤린네가 1809년 9월7일 꽃다운 나이에 갑자기 죽은 것이다.

여러 남자들에게서 구애를 받았던 카롤린네는 낭만주의를 상징하는 여성이었다. 카롤린네는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지만 불가사의할 정도로 여성적이고 마력을 자아내는 여인이었다. 실러는 그런 그녀를 ‘마담 루치퍼’라고 혹평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루친데’ 속에서 그녀를 이렇게 묘사한다.

“그녀의 존재 안에는 여성에게 고유한 것일 수 있는 모든 고귀, 모든 우아, 모든 거룩함과 모든 무례함이 있다. 그러나(그녀에게 있어) 모든 것은 섬세하며 교양이 있으며 여성적이다.”

셸링은 카롤린네를 잃은 아픔에도 불구하고 그 해에 <인간 자유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논구>를 펴냈고, <세계연대>와 같은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는 1820년에 에어랑겐 대학 정교수로 다시 교수활동을 했다.

1827년에 그는 뮌헨 대학의 정교수로 다시 초빙을 받아 그곳에서 1841년까지 머물렀다. 이 시기에 셸링은 ‘자연철학’의 영역을 떠나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경향을 담은 신화학의 철학 그리고 계시 철학에 대해 강의를 했다. 이 강의록은 <철학 입문, 신화학의 철학 그리고 계시의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발간되었다.

셸링은 1841년에 뮌헨을 떠나 베를린 대학으로 다시 한번 옮겨 간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셀링을 초빙해 당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던 헤겔 철학을 견제하고자 했다. 셸링도 왕의 의도를 따르고자 했다.

그러나 왕의 의도와 달리 헤겔 철학을 견제하기에 셸링은 역부족이었다. 셸링은 상심한 채로 대학 강단을 떠났다. 1854년에 휴양지 라가쯔에서 죽었다.

셀링은 말년에 헤겔 철학과의 대결에서 실패했지만, 사실 헤겔은 젊은 시절부터 셸링의 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헤겔은 피히테와 셀링의 사상을 그야말로 변증법적 종합을 했다.

셸링은 피히테와 다르게 객체로서의 ‘자연’을 강조했지만, 그의 근본문제는 주체와 객체, 정신과 자연, 이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사이의 대립을 ‘통일’하는 것이었다. 그는 정신과 자연의 동일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연은 가시적인 정신이어야 하며, 정신은 비가시적 자연이어야 한다.”

자연의 동일성 탐구

셸링은 <동일철학>을 통해 정신과 자연의 동일성을 이루는 근본원리가 무엇인지 탐구했다.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 하나”인 ‘절대적 일자’에서 나오는 것이라 주장했다. 이 절대적 동일성 속에 모든 대립은 무차별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헤겔은 이 절대적 동일성을 “모든 젖소를 검게 보이게 하는 밤”과 같은 것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헤겔은 셀링의 동일 철학의 사상을 받아 들여 자신 철학의 문제점으로 삼고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철학을 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정신현상학>이라는 책이었다.

셸링은 헤겔과 달리 끈질기게 한 문제를 가지고 붙들고 늘어지며 천착하는 스타일의 사상가가 아니었다. 천재적 영감과 재기 발랄함으로 철학적 주제를 만들고 그것을 풀어나가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셸링은 말년에는 신과 세계의 신비 속에 묻혀 지냈다. 그는 세계의 심층으로서의 신을 더욱 알기 위해 몰두했다. 그러나 그러한 작업은 책으로 출간되지 못하였다. 그가 세계와 세계의 본질로서의 절대자를 향한 추구를 멈출 수 없었던 것은 자기 자신의 근거에 도달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한번 길을 떠난 적이 있는 사람, 모든 것에서 버림을 받은 적이 있는 사람만이, 그에게 모든 것이 가라 앉아 버려 무한자와 더불어 자신만을 바라본 적이 있는 그 사람만이 자기 자신의 근거에 도달하며 삶의 깊이를 인식한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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