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철은 돌아왔다

[강상헌 칼럼] 강상헌l승인2008.11.17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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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철이 다가옵니다. 이런 글이 생각났습니다. 비록 여유롭지는 못했을지언정 이쁜 마음의 이웃들과 더불던 시절의 향수와 김치 김장의 본색을 잘 살필 수 있는 재미난 글이어서 같이 읽고 싶어졌습니다.

언론인이며 역사학자인 후석(後石) 천관우 선생(1925~1991)이 쓴 ‘신세시기’新歲時記)의 ‘겨울’ 한 조각입니다. 추상같이 분명하고 엄정한 역사의 해석과 명민한 문필활동으로 존경받는 후석 선생의 또 다른 면모를 을 수 있는 따뜻한 글이네요.

‘김장이 한창이다. 어린아이들이 매운 입을 다물지도 못하면서 자꾸만 무쪽을 달라고 보채는 것도 이 철이요, 가난한 아침상이나마 구수한 배추 밑동으로 흐뭇하게 국을 끓여 먹는 것도 이 철이다.

그러나 무어니 무어니 해도 벌겋게 버무린 배추 고갱이를 어적어적 씹어 먹는 맛이란 둘 째가라 하면 섭섭하다 할 초겨울의 진미다.

주머니와 의논을 해서 값을 덜 들이고 많이 담그는 재주나, 날씨와 의논을 해서 시지 않게 알맞은 맛을 내는 재주는 물론 숙련도 필요하겠고 재주도 관계가 있겠지만 이론만 가지고는 안 되는 묘리(妙理)가 있는 모양이다.

김장이 반양식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우리네 과동에는 없지 못할 필수품이고 보니 김장 잘 담그는 큰아기가 시집가는 데 유리한 것도 까닭이 있다.’

한 폭 그림입니다. 조선 후기 풍속화의 대가였던 단원(檀園) 김홍도나 혜원(蕙園) 신윤복이 이런 풍경을 그렸다면 의당 이 글을 읽는 느낌과 같은 그림이 나왔겠지요. 이 글에서 과동(過冬)이라 함은 겨울을 넘긴다는 뜻입니다. ‘김장이 반양식(半糧食)’이라 함은 우리 밥상에서 김치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겠네요.

재래시장에 배추 색 번지는 것이 완연합니다. 아파트 들락거리는 택배차에서 절인배추 상자가 제법 내려옵니다. 그런데 남녘은 12월이 돼야 비로소 ‘짐치 담을’ 생각을 합니다. 단풍 현란한 색깔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처럼, 김장 시기도 그렇게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배추 값이 예년에 비해 헐해 그나마 가난한 이웃들에게는 도움이 되겠으나 ‘새끼 돌보듯’ 배추농사 이뤄낸 농민들의 허망함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더구나-대가는 좀 받는다지만-물량 줄여 가격을 조절하기 위한 정부 시책에 따라 잘 자란 배추밭을 몸소 갈아엎어야 하는 농민들의 미어지는 마음을 우리는 꼭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예전 김장 날은 골목 잔칫날이었습니다. 지금은 아파트에 맞게 김장도 단출해졌지만 골목에 배추가 산을 이루던 그 시기에 김장은 모두의 일이었지요. 어머니들이 우물가에서 막 담근 김치를 죽죽 찢어 맛을 보고, 웃음꽃을 피워가며 서로의 입에 넣어주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어떤 때는 삶은 돼지고기가 푸짐했지요. 그날은 유난히 학교가 늦게 파하는 것 같았답니다.

‘조국근대화’ ‘새마을운동’ 등의 안간 힘으로 ‘한강의 기적’ 이루느라 그 사이 우리네 골목의 마음들이 많이 삭막해졌지요? 그 사이, 말로는 잘 설명이 되지 않는 정변이나 몰상식한 사변들이 우리를 많이 아프게 하고, 단련을 시켰습니다. 시나브로 서로 삿대질을 잘 하게 되고 ‘인간성 상실’ ‘소외’등의 단어가 예사롭게 쓰이게 됐지요.

어느 사이엔가 골목의 김장이 사라졌습니다. 분석은 무성합니다. 아파트 등 주거환경의 변화, 맞벌이의 일반화, 유통시설의 변화 등이 그 원인으로 꼽혔지요. 그러나 삿대질에 익숙해진 사람들 사이의 ‘머나 먼 거리’가 그런 원인들보다 더 큰 힘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요즘 김장이 다시 살아나고 있답니다. 김치냉장고와 택배 덕분이라고 하네요. 농민들이 밭 옆에서 배추 다듬고 천일염에 절여 택배차에 태우면 누구나 집에서 절인배추를 받으니 좀 편한가요? 물론 ‘골목의 김장’과 풍경은 좀 다릅니다만, 새 풍속이 되고 있는 절인배추 김장이 삿대질을 없애고 이웃 간 마음을 열게 하는 계기가 되어줄 것을 기대해 봅니다.

간편해졌다고는 하지만 절인배추로 김치를 담그는 일도 혼자 하기는 어렵지요. ‘두레’나 ‘품앗이’라는 아름다운 전통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이웃이 서로 힘을 합쳐 일을 이루는 보람도 작지 않겠습니다만, 그 보람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사랑과 우정은 우리 사회를 아름답고 활기차게 하는 생명력일 터입니다.

사먹는 김치는 상당 부분이 외국산이라네요. 김장 비용도 많이 줄었다고 합니다. 올해는 ‘우리 집 표’ 김치를 직접 담그시지요, 쓴 맛 나는 외국 소금 주의하시고요.


강상헌 본지 논설위원

강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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