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담배, 카드를 즐긴 문제학생 헤겔

철학여행까페[55]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8.11.24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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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을 알지 못하는 사람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 것이다!”

톨스토이가 한 말이다. 톨스토이는 헤겔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근대 유럽의 정신적 삶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그런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헤겔은 모든 지식을 포괄하는 철학을 구상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철학 속에 역사, 정신, 자연, 예술 등 인류의 정신사를 통째로 넣어 버리려 한 사람이다. 이렇게 커다란 스케일을 가진 그의 철학이 열매를 맺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셸링이 일찌감치 천재성을 드러내며 철학 무대에서 빛나는 활약을 했지만 헤겔은 오랫동안 무명에 가까운 철학자로 살아야 했다. 그러나 헤겔 철학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자 온 유럽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헤겔이 죽고 나서도 그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셸링을 초빙해 헤겔 철학을 견제하고자 했던 데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셸링도 헤겔 철학의 영향력을 막지는 못했다.

헤겔을 극복하는 일은 그 당시의 과제였지만 쉽지 않았다. 헤겔은 당시에 철학뿐만 아니라 법학, 종교학, 신학, 미학, 역사 등 모든 분야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렇게 학문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한 철학자 헤겔은 도대체 어떠한 인물일까?

유럽이 주목한 철학자

헤겔은 셸링과 같이 튀빙겐 신학교를 다녔다. 튀빙겐 신학교는 독일뿐만 아니라 인류의 정신사에도 빛을 발하는 걸출한 인물들을 같은 시기에 세 명씩이나 배출해 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지만 이 튀빙겐 신학교는 학생들의 소질을 계발하는 데 특출 난 교육방법이나 교육 조건을 갖춘 대학이 아니었다. 이 신학교는 튀빙겐이라는 전원적인, 다시 말해 시골 촌구석의 교육기관이었으며 대부분 고리타분한 중세적 관습들과 교수법에 따라 교육을 행하는 일종의 수도원에 가까운 학교였다.

튀빙겐 신학교
이동희
헤겔이 살던 기숙사 방

신학생들은 어둠이 내리면 자러 가야 했고, 동트기 전에 기상을 해야 했다. 그들은 흰 깃이 달린 가볍고도 검은 예복을 항상 단정하게 입고 다녀야 했다. 튀빙겐사람들은 검은 예복을 단정하게 차려 입고 다니는 그들을 보고 까마귀 즉 우리말로 옮기면 제비라고 불렀다.

참고로 말하자면, 횔덜린은 항상 단정하고 우아하게 옷을 입고 다녔지만 헤겔은 젊은 처녀들이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칠칠맞게 옷을 입고 다녔다. 단정한 옷차림으로 신학생들은 기도와 공동식사, 의무적인 강의에 참석해야 했고 산책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흡연은 물론이고 점심시간에 약간의 포도주를 마시는 것도 금지되었다. 포도주를 마시다 걸리면 퇴사를 당하거나 아니면 학생감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물론 춤도 금지되었으며 술집에 가는 것도 금지되었다.

이러한 규정들을 위반하면 처벌을 받았으며, 심한 경우에는 종종 ‘파비안-세바스티안’이라 불리는 학생감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이러한 엄격한 규율과 학생감옥은 신학교 선생님들에게는 학생들을 통제하고 제재하는 효과적인 수단이었지만 학생들에게는 불평과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도 학생들은 숨어서 할 짓은 다했다. 그들은 몰래 기숙사를 빠져 나와 술집에 가서 밤늦도록 술을 마시기도 했고 담배를 피웠으며, 카드놀이를 하며 소란을 떨기도 했다. 헤겔도 이런 일에 빠지지 않았다.

헤겔은 튀빙겐의 주점 ‘고겐비르트쉐프틀레’(Gogenwirtsch?ftle)에 자주 나타나는 술친구 중의 하나였다. 신학수업을 준비하는 대신 그는 그곳에서 열리는 철학 모임에 참여하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그는 담배를 많이 피웠으며, 카드놀이를 즐겨 했다. 헤겔은 무뚝뚝하지만 사려 깊은 위트를 통해 친구들의 배꼽을 잡게 하기도 하였다. 헤겔은 술집에서 늦게까지 있다가 아슬아슬하게 기숙사로 돌아오곤 했다. 한번은 헤겔이 만취되어서 늦게 기숙사로 돌아 온 적이 있었다. 그것을 보고 같은 방에 사는 가장 나이 많은 선배가 기가 차서 헤겔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 헤겔, 그나마 조금 남아 있는 정신마저 몽땅 마셔 버렸구나!”

헤겔은 또다시 술에 만취되어 수업시간 가까이 되어서야 돌아 왔다. 만취한 헤겔이 학교 감시관에 발각되어 심한 처벌을 받지 않기 위해 친구들은 수업시간 전에 급히 헤겔을 숨겨 주어야만 했다.

이동희
서재에 앉아있는 헤겔
청년시절의 방황


항상 행동이 노인처럼 굼뜨고 느긋했던 헤겔에게 친구들은 ‘노인네’라는 우스운 별명을 붙여 주었다. 팔로트(Fallot)라는 친구는 헤겔의 기념첩에다 지팡이를 짚고 있는 등이 굽은 노인으로 헤겔을 묘사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 옆에다 이렇게 써넣었다. “신이여, 이 노인네와 함께 하소서.”

이런 친구의 소망과 달리 신께서 헤겔과 함께 하지 못한 때가 두 번 있었다. 튀빙겐 신학교 시절 헤겔은 두 번이나 학생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다. 그는 1790년에 첫 번째로 학생감옥에 갇혔다. 처벌의 이유는 “학과를 게을리 하고, 늦게 기상하며 기도를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같은 해 2월 12일에도 심각한 경고를 받았지만 학생감옥에 갇히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1 뒤에 헤겔은 또 다시 학생감옥에 갇혔다. 휴가 갔다가 늦게 돌아 온 죄로 헤겔은 두 시간 가량 학생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다.

헤겔의 변명은 “말이 오는 도중에 못쓰게 되는 바람”에 늦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학교 감독관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헤겔의 가장 친한 친구인 핑케(Finke)와 팔로트가 허락도 없이 헤겔을 마중하러 나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도중에 헤겔과 만나서 무엇을 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헤겔을 비롯한 학생들은 튀빙겐 신학교의 엄격한 생활에만 불만이 많았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강의에도 불만이 많았다. 그들은 고리타분한 중세적 방법에 의해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교수진들은 대부분 보수적이거나 시대에 뒤떨어져 있었다.

셸링 아버지의 친구이자 셸링과 가까운 친척인 동양학자 쉬누러(Ch.Fr.Schnurrer) 만이 유럽 전역에 이름이 알려져 있었고, 루소와 친분을 나눌 정도로 국제적 감각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도덕과 신약을 강의한 플라트(Johann Fr. Flatt)와 조직신학을 강의한 스토르(Gottlob Storr)가 특출난 정도였다.

철학을 가르쳤던 아벨 교수와 벡크 교수는 보수적이었고 당시 출간되어 독일 전체의 정신적 풍토를 뒤흔들기 시작했던 칸트의 철학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튀빙겐의 학생들은 선생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스스로 모임을 만들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었다. 읽고 나서 서로의 견해들을 교환하였으며 토론을 하였다.

이 모임에 셸링은 적극적이었지만 헤겔은 참여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 헤겔은 칸트에 별로 흥미를 못 느끼고 있었고, 루소에 훨씬 매료되어 있었다. 헤겔과 같은 시기에 공부했던 로이트바인(Leutwein)은 쉬베글러(Schwegler)에게 보낸 서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 나는 …헤겔의 만년이 정말로 그를 변화시켰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로 변화시켰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어쨌든 우리가 보다 가까이 지냈던 4년 동안에 형이상학은 헤겔의 특별한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의 영웅은 루소, 그는 루소의 <에밀>, <사회계약론>, <고백>을 계속해서 읽었다.”

헤겔은 형이상학보다는 정치적 사건과 현실에 훨씬 더 관심을 보였다. 이 시기에 헤겔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다. 1789년 7월 14일 성난 파리의 시민이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하고, 프랑스 전제주의 왕정을 무너뜨린다. 헤겔은 만년에 그가 젊은 시절에 받은 커다란 인상을 회고하면서 이 혁명을 “찬란한 일출”이라고 부를 정도로 프랑스혁명에 대한 감동을 평생 지니고 살았다.

튀빙겐 신학교는 프랑스 국경과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학생들은 누구보다 빨리 사건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프랑스어 신문을 읽었으며, 프랑스의 시민법과 인권선언에 따라 유럽이 윤리적으로 재생되기를 희망했다.

혁명을 찬양하다

튀빙겐 대학에서는 정치적 클럽이 생겨났다. 헤겔과 셸링도 이 정치적 클럽의 회원들과 가까이 지냈다. 전설적인 이야기지만, 1791년 봄 어느 맑은 일요일 아침에 헤겔과 셸링은 프랑스의 모형을 따라 자유의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헤겔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정치적 클럽은 한 약사의 밀고에 의해 탄로가 났다. 칼 오이겐 대공은 화가 나서 진상을 조사하러 신학교로 왔지만 이 사건의 주모자인 베첼(August Wetzel)은 재빨리 스트라스부르크로 도망을 갔다.

베첼은 1792년 4월에 야코비그룹의 일원으로 스트라스부르크에 체재하였다. 이 시기에 헤겔의 기념첩을 보면 혁명적 글귀들이 눈에 띤다. ‘독재타도! 무뢰한에게 죽음을!’, ‘사람들의 가슴에까지 절대적 권력을 요구하는 끔찍한 정치를 끝장내자!’, ‘자유만세! 장 자크(루소) 만세!’

헤겔은 혁명에 열광했으나 혁명가는 되지 않았다.

<다음 호에 계속>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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