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혁신·대전환, ‘침묵의 카르텔’을 깨라

신년칼럼/살던 대로 살지 맙시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l승인2023.01.01 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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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지금 나라꼴이 말이 아닙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더구나 촛불혁명이 진행중이라고 자랑하던 나라가 말이지요.

촛불이 일으킨 변칙적 사건

바로 진행중인 촛불혁명 때문에 전대미문의 사태들이 벌어지게 마련이라고 저는 주장해왔습니다. 윤석열정권의 등장이 촛불혁명이 아니고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변칙적 사건’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우리의 촛불혁명은 세계사적으로도 독특한 혁명이기에 그것이 지금 진행되는 역사라는 사실을 얼핏 몰라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빼고는 설명이 안 되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윤정권에 대한 판단도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촛불이라는 역사의 격변이 아니고서 어떻게 이런 정권이 태어났겠습니까. 문재인정부가 해낸 것이 적지 않은데도 촛불정부를 자임했었기에 제대로 못한 부분으로 인한 시민들의 분노는 통상적인 수준을 훨씬 넘었습니다.

반면에 촛불정부가 한 번 더 들어서면 자기네는 끝장이라는 기득권집단의 절박감도 남달랐습니다. 집권에 성공하자마자 지리멸렬하게 갈라진 여러 인사들이 선거 때는 필사적으로 대동단결하지 않았습니까. 후보가 무능하고 무개념이면 어떠냐, 당장에 유권자를 속이는 데 가장 유리한 인물이라면 ‘악마면 어떠냐’는 것이 그들의 공감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민주당의 절박감이 태부족이었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입니다. 이것도 촛불을 빼고는 온전한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촛불 대 반촛불의 전선은 지난날 여야대립 또는 ‘진보 대 보수’의 대치선과도 달랐습니다. 민주당 내부에도 전선이 그어진 것입니다.

그나마 촛불시민들의 열정으로 2기 촛불정부를 꿈꾸는 대선후보가 선출되었지만 대다수 국회의원들은 민주당의 정권 재창출만 생각했고, 심지어 2기 촛불정부보다는 차라리 정권교체를 감수하겠다는 정서가 드물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 국민은 뜻밖의 난관에 직면했고 새 정부 집권 1년차에 이미 ‘이게 나라냐’ ‘이대로는 못살겠다’라는 함성과 신음이 들리게 되었습니다.

있어야 할 데는 없고 하지 말아야 할 일에는 민활한 국가

최근에 158명의 젊은 생명이 희생된 10‧29 이태원참사만 해도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와 차원이 다른 양상입니다. 세월호참사의 전례가 쉽게 떠오릅니다만 그때는 서울 시내 한복판의 길거리에서 일어난 참사는 아니었습니다. 정부의 대처가 무능했고 책임을 감추려고 유가족에 대한 온갖 탄압을 하기는 했지만, 주무장관인 해양수산부장관이 일찌감치 사의를 표했고 대통령은 진심이든 아니든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으며 해경 해체라는 극단적 조치까지 발표했습니다. 촛불대항쟁이 벌어지기까지 2년여의 시간이 걸렸던 것은 진상규명에 대한 방해공작뿐만 아니라 그런 ‘성의표시’나마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10‧29참사의 경우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돌볼 국가가 없는 정도는 훨씬 심했습니다. 반면에 사람들이 죽고 다친 뒤 국가는 실로 놀랄 만큼 신속하고 민첩하게 움직였습니다. 가족들이 희생자의 시신이 어디 있는지도 몰라서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지옥의 시간을 보내도록 만들었고, 유족들끼리라도 소통하며 서로를 위로할 기회를 철저히 봉쇄했습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로서 그런 꼴까지 겪어야 했던 억울함과 분노를 누가 감히 필설로 형언하겠습니까.

정부의 이런 패륜적인 대응은 세월호참사의 교훈을 그들 나름으로 숙지했기 때문입니다. 세월호가 정권에 어떤 치명타가 되었는가를 기억하면서 그들은 어쩌면 겁에 질려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름의 민활한 대응을 했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는 못하지만 수많은 공권력의 손으로 유가족의 입을 막고 눈을 덮는 데 한동안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얄팍한 짓거리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 더 큰 분노와 비난을 사는 단계가 오고 말았습니다.

여당과 언론은 왜 저 모양인가

정부는 그렇다 치고 국민의 표를 얻어야 하는 정당인 국힘당은 왜 저 모양일까요? 저는 우리 사회에서 촛불혁명으로 가장 많이 변한 집단 중 하나가 지금의 여당이라고 생각합니다. 촛불대항쟁으로 크게 깨진 뒤 그들은 물불 안 가리고 자기 잇속이나 챙기는 집단으로 바뀐 것입니다. 수십년을 특권과 반칙으로 먹고 살아온 세력으로서 여전히 ‘살던 대로 살자’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이 없어진 겁니다. 오랜만에 정권을 되찾은 김에 최대한으로 챙겨야 하는데, 국고에 들어온 돈을 풀어주고 ‘좋은 자리’를 나눠주는 것은 대통령이 장악한 행정부입니다. 국힘당 인사들이 희생자와 유가족을 상대로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태연하고 빈번하게 해대는 것도 국민이 아닌 대통령의 심기에 맞춘 소리지요.

언론은 왜 또 그 모양인가요? 군사독재 시절의 탄압에 비하면 검찰왕국의 칼춤은 약과인데도 ‘알아서 기는’ 언론이 그토록 많은 현실 또한 음미해볼 일입니다. 소위 레거시언론의 이런 행태 역시 촛불시대의 특징입니다. 이 경우에도 전선은 ‘조‧중‧동 대 진보적 신문’에서 조‧중‧동보다 좀 낫다는 언론사들의 내부로까지 이동했고, 더 뚜렷하게는 촛불시민들이 몸소 언론활동에 나선 유튜브, SNS 등 풀뿌리언론과 기성언론 사이에 그어졌습니다.

물론 레거시언론에도 좋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언론사 자체로 보면 독자를 확보하기 위한 보도경쟁보다 광고계의 큰손을 잡는 사업이 주안점이 되어왔습니다. 옛날 같으면 신문사마다 남이 못하는 ‘특종’을 하고자 열중했고 기사를 놓친 타사 기자들은 ‘낙종’했다고 데스크한테 깨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유튜브에 어떤 단독보도가 나오든 일치단결해서 무시하면 아무도 낙종을 안 한 셈이 됩니다. 이른바 ‘침묵의 카르텔’이 형성된 것이지요.

지금은 정계와 언론계뿐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 낮도깨비들이 총출동한 형국입니다. 그게 원래 없던 존재가 아니라 음습한 데 숨어서 활동하다가 양지로 나왔으니 이것도 촛불의 위력이라면 위력입니다. 다만 그런 성과를 내세우기만 하고, 그들을 퇴치하고 제도하지 못한다면 루쉰(魯迅)이 말한 ‘정신승리’의 극치가 되겠지요.

‘퇴진’의 종류와 경우의 수들

세월호참사는 박근혜정권 2년차에 일어났는데 이태원참사는 윤석열정권 첫해에 발생했습니다. 참사 후 2년 넘게 지나서야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시위가 본격화된 반면, 이번에는 퇴진운동이 이미 벌어지고 있던 상황에서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윤석열 퇴진이 박근혜 퇴진보다 더 확실하다고 단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2016~17년 대항쟁의 ‘리바이벌’을 기대하는 것은 시대마다 새로운 해법을 찾아야 하는 과제를 소홀히 하는 태도일 수 있습니다. 다만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윤석열 대통령이 반드시 물러나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그의 퇴진 문제도 상상력을 한껏 펼쳐가며 연마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퇴진이라는 것도 여러 종류지요. 박근혜 대통령처럼 탄핵에 의해 강제퇴진 당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이승만 대통령처럼 자진해서 하야한 경우가 있습니다. 애초에 박근혜씨도 시위군중이 하야를 요구했는데 끝내 안 들으니까 헌법절차에 따라 파면했던 것입니다. 이승만은 자진해서 물러났지만, 경찰의 발포로 유혈사태가 벌어진 뒤에 이루어진 하야이므로 그런 경로를 우리가 답습해서는 안 되겠지요.

외국의 사례로 임기 도중에 사임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있습니다.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이 확실시되자 미리 물러나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그는 자기 살길을 마련해놓고 나간 점이 특이합니다.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면서 닉슨을 사면해준 것입니다. 그 후폭풍으로 포드는 재선에 실패하지만 어쨌든 대통령 하야의 또 하나의 사례로 남았습니다.

미국과 한국은 제도가 다르기 때문에 이것도 하나의 참고자료에 불과하지요. 그러나 ‘윤석열 퇴진’을 정말 이뤄내고 말겠다는 사람이라면 퇴로를 열어주면서 퇴진시키는 방식이 과연 바람직한지, 다시 말해 촛불시민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을지, 그렇더라도 누가 주도하여 조율하고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지, 여러 가능성을 차분하게 연마해볼 일입니다.

‘언제’냐에 따라 ‘어떻게’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2027년이면 임기만료로 윤석열 퇴진은 저절로 이뤄집니다. 어떤 분들은 그것이 정상적이며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때까지 참고 견디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다고 체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체념하는 분들이 ‘이렇게는 못 살겠다’는 아우성의 절박함을 나라의 주인으로서 판단한 것인지, 살던 대로 4년을 더 살면 세상과 나라가 어떤 꼴이 되어 있을지를 성찰해본 건지는 물어봄직합니다.

조기퇴진 논의도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박근혜시대로 치면 탄핵이 이루어진 4차 연도에 해당하는 것이 2026년입니다. 그런데 한번도 안 가본 길을 어렵사리 열어서 뒤늦게나마 정권퇴진을 이룩했을 때와 이미 탄핵을 해본 역사 속의 시간표는 다릅니다. 1년차부터 퇴진을 부르짖다가 3년차까지도 성공 못했는데 4년째 들어가서 곧 물러갈 사람을 두고 퇴진행동이 불붙기는 어렵겠지요.

그래서 더 앞당겨 2025년에 희망을 거는 이들도 있습니다. 2017년이 20대 총선 이듬해였듯이 2025년은 22대 총선의 다음해가 됩니다. 총선에서 야권이 크게 이겨 탄핵 정족수를 확보하거나 여당의 분열로 퇴진이 성사되리라고 기대하는 거지요. 하지만 촛불시민들의 요구를 그때까지 실현하지 못한 야권이 총선에서 크게 이길지는 의문입니다. 게다가 재선에 성공하여 2028년까지 꿀단지 하나씩을 확보한 국회의원들이 촛불혁명의 전진에 얼마나 열성을 보일지도 모를 일이지요.

2024년 총선의 해에 기대를 품는 분들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는 2025년 대망론과도 통하는 발상이지요. 그런데 역사적으로 선거라는 이벤트는 혁명에 독이 되기 일쑤였습니다. 물론 독재가 아주 심한 상황에서 ‘선거혁명’이라는 게 일어나기도 합니다만, 압도적 다수 의석을 가진 야당이 2024년까지도 성과를 못 내다가 한 이삼십석만 더 주시면 꼭 퇴진시키겠노라고 했을 때 국민들이 과연 얼마나 귀엽게 봐줄까요? 이 문제도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접근할 일입니다.

촛불시민들의 직접행동으로 말하면, 2016년에는 그해 12월에 정점에 달하여 국회의 탄핵결의를 끌어냈습니다. 이어서 헌재가 탄핵을 인용할 때까지 시민들이 추운 겨울을 버텨냈지요. 2022년의 촛불행동은 그 수위에까지 도달하지 못한 채 혹한을 만났습니다. 결의에 찬 시민들이 이 고비를 넘겨 시위의 열기를 지켜낸다면 새해 봄쯤 최고조에 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열기가 2023년을 넘어 총선국면으로까지 이어지기는 힘들 것이고 자칫 지루한 대치상태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2023년만 돼도 총선 말고 다른 생각이 없는 이들이 부쩍 늘어날 겁니다. 이럴 때 선거가 촛불혁명에 독이 되는 대신 어떻게 촛불과 상승작용을 일으키게 할지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유리한 점 하나는 민주당에 2기 촛불정부 건설을 꿈꾸는 대표가 있다는 점이고, 국민의힘에서도 오히려 선거를 앞둔 상태기 때문에 윤석열 간판으로 자신이 당선될 수 있겠는가 고민하는 의원이 많아지리라는 것입니다. 불 보듯 뻔한 경제위기의 본격적 도래와 서민 살림의 극한적 추락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예단하기 어렵습니다. 대체로 혁명은 경제가 최악의 상태를 벗어나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할 때 일어난다는 게 정설입니다. 그러나 이미 촛불혁명을 일으켜서 추진 중인 시민들이 경제마저 망가뜨리는 반촛불정권을 응징하는 문제는 차원이 다른 사안이지요.

개벽세상의 문턱에서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점점 실감되는 지구생태계의 위기 앞에서 너무 국내정치에 열중한다는 비판을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당연히 더 넓은 세상의 큰일들도 생각해야지요. 당장에 한국이 당면한 국제적인 어려움만 하더라도 미‧중 갈등이라는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미국과 일본 따르기에 골몰하는 정권 아래서 막막하기만 합니다.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 역시 2017년보다 오히려 더 위태로운데, 현 정부는 반전을 이뤄내려는 능력은 물론 의지조차 없어 보입니다.

아무튼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사는 땅에서 벌어지는 참담한 현실을 젖혀두고 벌이는 거대담론이나 거시적 전망은 한담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이 땅에 나라다운 나라를 세우는 일은 한국사회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 현존 세계체제로서도 관건적 사안입니다. 한반도의 분단체제는 세계체제의 핵심적 일부이자 약한 고리거든요. 따라서 촛불혁명은 기존 세계의 대세를 거스르는 작업이며 나라 안팎을 막론하고 기득권세력들이 용납하기 어려운 사태입니다. 윤석열정부의 등장이 변칙적인 사건이라지만, 체제화된 분단현실과 그것을 뒷받침해온 강대국 기득권층의 동조라는 나름의 토대가 있어서 발생한 사고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던 대로 생각하고 살던 대로 살아서는 결코 이겨낼 수 없습니다. 분단체제는 힘이 셉니다.

그러나 우리 민중과 민족도 지혜롭고 끈질기며 힘이 셉니다. 조선왕조 몰락기에 동학이라는 새 사상이 나와서 이 땅의 후천개벽운동을 출범시켰고, 비록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패배했으나 동학혁명이 민중의 각성과 헌신을 보여주었으며, 식민지 아래서의 3‧1혁명 같은 변혁 노력이 분단시대에도 지속되어 드디어 남한에서 촛불혁명을 일으키고만 성취의 역사가 있습니다.

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촛불혁명의 와중에 변칙적으로 대두한 정권과의 대결이라는 비교적 선명한 목표를 갖게 되었습니다. 한반도와 인류사회 전체의 대혁신, 대전환에 결정적으로 기여할 복된 시기를 사는 영광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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