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정의 ‘홍실이’

책으로 보는 눈 [68] 최종규l승인2008.12.09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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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정 님이 1987년 한 해 동안 ‘새소년’에 그렸던 <홍실이>(서울문화사, 1990)는 고작 초등학교 1학년 아이 이야기입니다.

홍실이는 아빠가 다니는 회사에 시험지를 들고 가서는 “아빠가 그랬잖아, 50점 이상 받아오면 선물 사 주겠다고. 그런데 드디어 오늘 5점이나 더 많은 55점을 받았지 뭐야. 내 시험 사상 처음 있는 일이야. 아빠, 잘했지?”(22쪽) 하고 방정을 떠는 아이입니다. 아빠는 회사에서 동료 직원이나 후배 직원한테 웃음을 사느라 부끄러운데, 홍실이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빤 기쁘지도 않나 봐” 하고 묻고, 아빠가 “기쁘다, 기쁘다, 으으으으” 하니 “그럼 빨리 선물 사 줘요” 하고 재촉합니다.

아빠는 “이 녀석아, 그런 건 집에 가서 얘기해도 되잖아” 하고 나즈막하게 타이르는데, 홍실이는 “오늘 토요일이잖아요 뭐,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집에서 종일 낮잠만 주무실 거죠. 월요일은 무슨무슨 일 때문에 못 사 왔다고 그럴 거죠. 화요일에는 저런저런 일 때문에 그냥 오실 게 틀림없죠. 수요일에는 고만고만한 일 때문에 빈손으로 오실 게 뻔하죠. 목요일에는…” 하고 부지런히 수다를 떱니다.

아빠는 목댕기를 입에 물고 엉엉 울면서 “알았다, 알았다! 그래 뭘 사 줄까? 빨리 얘기하고 가!” 하고 외치고, 홍실이는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네요. 아빠 퇴근할 때 같이 나가서 살 거라고요” 하며 다그칩니다. 후배 직원들은 “과장님은 아이들에게 늘 거짓말만 하는 모양이죠?” 하고는 웃습니다. 아빠는 다소곳하게 “무, 무슨 말씀을” 하지만, 이내 홍실이는 “주로 8:2 비율로 거짓말이 많아요” 합니다. 홍실이는 ‘없는 얘기를 지어서’ 했을까요? 늘 겪는 이야기를 ‘꾸밈없이 찬찬히’ 했을까요.

말괄량이에다가 오도방정을 떤다고 할 만한 홍실이입니다. 집에서고 학교에서고 동네에서고 하루라도 말썽을 피우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아빠, 엄마, 오빠며 선생님, 학교, 동무, 동네 어르신들이며 홍실이한테 치이고 볶이느라 언제나 골머리를 앓습니다. 그렇지만 홍실이는 한결같이 ‘꾸미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느끼는 대로 보는 대로 듣는 대로 받아들이면서’ 지낼 뿐입니다. 홍실이가 벽에 매직으로 낙서를 할 때에 어느 어른도 ‘홍실아, 그림은 여기에 그려야지’ 하면서 그림종이를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홍실이가 여름에 처음으로 수박을 먹은 날 동네사람한테 ‘수박 먹었으니 자랑해야겠다’며 쪼가리를 문 둘레에 흩뿌려 놓았을 때 ‘홍실아, 우리는 여름날 수박을 먹지만, 이웃 가운데에는 수박 구경을 못하는 사람도 있잖니’ 하고 토닥이지 않았습니다. 홍실이는 어른들 매무새를 바라보면서 제 삶을 꾸리고, 어른들이 마주하는 매무새를 들여다보면서 제 생각을 가꿉니다.

어른이나 손윗사람 가운데 홍실이한테 마음을 열고 차분하게 다가오는 사람은 없지만, 외려 홍실이는 어른과 손윗사람과 동무한테 수수하게 다가섭니다. 꾸미면서 살고 번드르르함을 찾으며 남 위에 올라서려는 사람들이 홍실이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고 합니다. 0점짜리 시험지를 들고도 웃을 줄 아는 씩씩한 홍실이는 외로운 가슴일 텐데, 되레 외로운 이웃한테 웃음과 사랑을 나누어 줍니다.


최종규 1인 잡지 <우리 말과 헌책방> 내는 사람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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