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거인으로 우뚝 서다

철학여행까페[57]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8.12.16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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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철학은 그 시대의 아들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헤겔의 철학은 어떤 시대를 그 아버지로 가지고 있었을까?

헤겔의 시대는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났던 해였고, 사상사적으로도 유례가 드물 정도로 많은 인물들이 출현했던 시기였기도 하다. 헤겔 보다 21살이나 나이가 더 많았던 괴테는 자신의 시대를 다음과 같이 술회한 적이 있다.

“나는 가장 위대한 세계적 사건들이 일상사처럼 일어나 나의 긴 생애동안 계속되던 시대에 태어났다는 커다란 장점을 가졌다. 그래서 나는 7년 전쟁, 그 후 영국으로부터 미국의 독립, 더 나아가 프랑스 혁명과 끝으로는 전체 나폴레옹 시대로부터 영웅의 몰락까지 그리고 그 후의 사건들의 생생한 목격자가 될 수 있었다.”

역동의 역사를 목격하다

비록 나이는 괴테보다 어렸지만 7년 전쟁만 빼면 헤겔도 앞에서 괴테가 언급한 사건을 모두 목격했다. 헤겔의 생애에 벌어졌던 이런 세계사적 사건들, 특히 프랑스 혁명은 당시 유럽에 있어 산업과 정치의 후진국이었던 독일에 살던 지성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헤겔 당시의 독일은 봉건적 전제주의에 대항해서 시민혁명을 주도할 만한 정치적 소양을 가진 강력한 중산계급이 없었다. 헤겔을 비롯한 독일의 지성인들은 프랑스혁명의 이념에 공감했지만, 여건상 프랑스와 같이 현실적 혁명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 대신에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정신’ 속에서 ‘혁명’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마르쿠제는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다.

“독일관념론은 프랑스 혁명의 이론이라 불리어 왔다. 이 말은 칸트, 피히테, 셸링 및 헤겔이 프랑스혁명에 대한 이론적인 해석을 제공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철학이 대체로 프랑스로부터의 도전에 대한 응답으로서 국가와 사회를 합리적 기초 위에 재구성하여 사회적, 정치적 제도들을 개인의 자유 및 이익과 조화시키고자 하는 목적에서 쓰여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헤겔은 프랑스혁명을 평생 기념했다. 그는 <역사철학강의>에서 프랑스혁명을 “찬란한 동 터오름”에 비유했다. 프랑스혁명을 이성과 합리성에 기초해서 사회가 새롭게 구성되는 세계사적 사건으로 특징짓기도 했다.

그는 인간이 걸어 온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역사는 단순한 전쟁과 살육의 싸움터가 아니라 이성이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이었다고 해석한다. 그 과정은 한 사람의 자유로부터 만인의 자유로 나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동희
헤겔의 묘비

헤겔은 거대한 철학체계을 통해 이러한 신념을 더욱 확고하게 뒷받침했다. 그가 하이델베르크대학교의 교수시절에 쓴 <철학강요>(1817)는 절대정신이 세계와 우주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헤겔은 정신의 자기 인식에 따라〈철학강요〉를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학의 3부분으로 나누어 집필했다.

논리학은 사유법칙에 관한 형식적 이론이 아니라 순수 이념을 다룬 학문이다. 헤겔은 논리학은 자연과 유한한 인간 정신의 창조 이전에 신의 영원한 본질에 관한 서술이라고 말했다.

자연철학은 순수이념이 시간 공간속으로 전개된 것을 다룬다. 자연은 정신에 의해 창조되고 그 창조자의 표지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정신은 아직 자연 속에 함몰되어 자기 자신이 자연의 본질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자연철학의 과제는 자연에 외화되어 있는 정신이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인간 안에서 자연은 자기의식으로 성장한다. 정신철학은 타자 존재인 자연과 외부세계로부터 자신에게로 회구하는 정신의 이념을 다룬다.

헤겔은 거대한 철학 체계를 통해 역사와 자연을 포함해 삼라만상이 어떠한 방향으로 진행되는지 그려 놓았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정신의 자기 인식이자 자기 회복과정이다.

자연이나 역사는 정신에 의해 산출된 것이다. 그러나 정신은 자연과 역사에서 자신이 주인인 줄 모르고 소외되어 있다. 헤겔은 정신이 자연과 세계 속에서 자기 자신이 주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러한 세계를 되찾아 가는 과정을 세계사라고 본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자유를 되찾고 그러한 자유를 법으로 명문화한 프랑스 혁명은 헤겔의 세계사에서는 필연적인 사건일 수밖에 없다.

헤겔은 세계사에 대해 이렇게 말을 한다.

“이성이 세계를 지배한다”

“이성이 세계를 지배한다. 그러니까 세계사는 이성적으로 진행된다.”

1818년 헤겔은 피히테가 죽은 뒤 비어 있던 베를린대학교 철학과 교수직을 이어 받았다. 그는 베를린에서는 철학 체계의 부분들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곁들인 강의를 했다. 객관정신에 해당하는 ‘법철학’에 대해 상세한 주를 곁들여 강의한 다음, 그는 <법철학강요>(1821)를 펴냈다.

〈법철학강요〉를 출판한 뒤 그는 더욱 강의에 진력했다. 미학, 종교철학, 역사철학, 철학사에 관해 강의를 했고, 그의 강의록은 제자들에 의해 책으로 편집 출판되었다. 1823~1827년에 그의 활동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 시기에 수백 명의 수강자들이 독일 전역과 외국에서 몰려들었다. 그의 명성은 열성적인 제자들에 의해 해외로 퍼졌다.

그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는 1826년 8월 27일에 있었던 그의 56회 생일 축하 에피소드가 말해 준다. 생일 기념식은 베를린에서의 헤겔의 영향력과 명성에 걸맞게 성대하게 치루어 졌다. 헤겔은 성대한 생일축하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헤겔의 제자들과 친구들이 헤겔을 위해 생일축하준비위원회를 구성해 헤겔의 생일을 성대하게 치루기로 결의하였다. 학생들과 친구들은 그의 생일을 축하하기위해 고마운 마음을 새겨 은잔을 그에게 선물했다.

그리고 밤새도록 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학생들은 나팔을 불었다. 다음 날은 괴테의 생일로 이어지는 날이기도 했다. 헤겔과 괴테를 축하하는 성대한 생일잔치를 그 지역의 신문이 기사화했다.

헤겔의 적대자들은 왕에게 그러한 기사에 대해 보고했다. 왕은 시인과 학자가 그렇게 성대하게 축하를 받는다면 왕의 명성이 가려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 기사를 본 왕은 신문에 대한 검열을 강화해 앞으로는 왕의 가족이나 정부인사가 아닌 개인에게 생일축하 기사 같은 것을 싣지 못하도록 했다.

이동희
헤겔 기념메달
헤겔의 학문적 노력에 대한 보상은 그날의 생일잔치로 끝나지 않았다. 헤겔은 1829년에 베를린 대학의 총장에 선출된다. 그리고 그의 60회 생일에 제자들은 헤겔에게 기념주화를 선물했다. 주화의 앞면에는 헤겔의 프로필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상징적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그 그림의 중앙에는 남자 정령이 서 있고, 오른쪽에는 신앙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든 여성의 모습이 그리고 왼쪽에는 앉아서 책을 보고 있는 학자와 그 학자 머리 위에는 지혜의 상징인 올빼미가 함께 새겨져 있다. 사람들은 신앙과 지혜를 연결하는 상징이라 생각했다.

헤겔은 국가로부터도 훈장을 수여 받았다. 학문에 대한 공헌과 대학총장으로서의 행정업무에 대한 국가로부터의 보상이었다. 이제 헤겔은 학문적으로 뿐만 아니라 인생의 절정기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절정기에 있던 헤겔에게 종말이 그렇게 빨리 다가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헤겔은 1831년 11월 14일에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그는 밤새도록 앓고 난 다음날 오후 3시에 사망했다. 그가 사망한 날은 115년 전에 라이프니츠가 사망한 날이기도 하다. 그가 죽은 원인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엇갈린다. 헤겔 죽음에 대한 공식적인 원인은 아시아의 콜레라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헤겔의 죽음에 대한 다른 설도 있다. 헤겔 부인은 헤겔이 콜레라로 죽은 것에 대해 의심하는 글을 남겼다.

“당신도 이 모든 것이 콜레라의 징후라고만 여겨지는지 말해 보십시오. 의사들, 의료고문 바레쯔 그리고 추밀고문관 호른 등은 콜레라로 생각했습니다… 헤겔이 콜레라에 걸린 것으로 위원회에 보고되었지만 우리 친구들 중 그 누구도 겁을 내거나, 우리 친구들 중 가장 겁쟁이들조차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의 거실에 사랑하는 사람의 시신이 있어야만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위원회는 저의 거실을 폐쇄한 다음 모든 것을 연기에 쏘이고 소독을 했습니다.”

헤겔의 또 다른 사망원인으로 추정되는 것은 그의 만성적 위병이었다. 그의 만성적 위병이 갑자기 악화된 원인은 헤겔의 제자 간스 때문이라는 보고가 있다. 학교에 출근했을 때 헤겔은 간스가 학생들에게 공지문을 붙인 것을 보았다. 간스는 공지문을 통해 학생들에게 자신의 강의 보다 헤겔의 강의를 들으라고 권했다.

헤겔은 몇 년 전부터 법철학에 대해 강의하지 않고 그것을 간스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교육부의 고위관료는 “간스 교수가 모든 학생을 공화주의자로 만든다”는 불만을 표시하고 강의를 다시 헤겔이 맡도록 했다. 헤겔은 간스와 나란히 강의를 개설했지만 강의에는 25명의 학생만 신청을 했다. 헤겔은 건강상의 이유로 그 강의를 취소했다.

헤겔은 1831년 겨울학기에 법철학강의를 다시 예고했다. 간스는 지난 학기와 같은 일이 일어날까봐 학생들에게 스승 헤겔의 강의를 듣도록 권유한 것이었다. 그러나 헤겔은 이러한 간스의 행위에 대해 심한 모욕을 느꼈다. 헤겔은 자신이 간스를 시켜 그러한 공지문을 붙이게 한 것처럼 오해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제자 간스에게 신중할 것을 촉구했다. 편지는 1831년 11월 12일에 쓰여 졌고, 다음날 헤겔은 사망했다. 간스의 호의적인 행위를 오히려 모욕으로 받아들인 헤겔은 치민 화 때문에 지병인 위병이 급작스레 악화된 죽었다는 것이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죽지않는다

사망이 원인이 어떻든 간에 헤겔의 죽음은 사상계에 커다란 충격이었다. 헤겔은 사망한 후 평소 존경하는 피히테의 무덤 옆에 묻혔다. 그가 탄 장례마차 뒤를 대학총장부터 학생들이 뒤따랐다. 불타는 횃불을 들고 영송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들은 불을 피우지 않은 횃불에다 검은 천을 감아서 들어 죽은 스승에 대한 존경과 예의를 표했다.

헤겔이 갑자기 죽고 난 뒤에도 헤겔철학의 영향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거대한 철학 체계와 그 속에 들어 있는 다양한 주제들 그리고 변증법적 방법은 관념론, 무신론, 유물론에 이르기까지 넓은 해석의 여지를 남겨 놓았다. 그가 죽고 나서 헤겔철학은 좌우파로 갈라졌다.

헤겔 좌파의 세례를 받은 맑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가져다 사회, 경제, 역사를 설명하는 방법으로 사용했다. 키에르케코르는 헤겔철학과의 대결을 통해 자신의 철학적 세계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현대에 들어서도 헤겔은 수많은 철학자들에게 영감의 원천이거나 아니면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헤겔은 죽은 뒤에도 지금까지도 영향을 발휘하는 철학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둠이 내린 뒤에도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잠들지 않는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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