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활서 먹은 감자의 기억

내 인생의 첫 수업[8] 이유정l승인2007.06.30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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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농촌에서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고 직접 농사를 지은 경험이 있는 분이다. 그래서인지 날씨가 나쁘면 입버릇처럼 농사걱정을 하셨다. 봄 가뭄이 계속되면 “비가 와야 모내기를 할 텐데”라고 걱정하셨고, 가을비가 며칠 동안 계속 내리면 “이렇게 비가 많이 오면 벼이삭이 여물지 못하는데”라고 걱정하셨다.

그런 어머니 덕분에 나는 시골에 한 번도 못 가보았으면서도 농사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가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에 농활을 가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직접 농사를 지어봐야 입에 들어가는 쌀 한 톨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보름 동안 집을 떠나는 것을 흔쾌히 허락해 주셨는데, 이는 농활이 운동권학생들의 의식화 수단으로 알려져 있던 80년대의 분위기에서는 꽤 이례적인 일이었다.

처음 잡아본 호미자루

고속버스로 3~4시간을 달린 후 다시 시외버스에 몸을 싣고 덜컹이는 비포장 도로를 한 시간 정도 달려서 도착한 곳은 전북 임실군. 옥정호라는 아름다운 호수를 끼고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도착하던 첫날 이장님은 우리가 쓴 모자에 새겨진 “가자! 거치른 들판에 해방의 깃발로”라는 구호가 불온하다면서 우리 일행이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셨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마을회관에 들어가 짐을 풀기는 했지만, 한동안 농민들을 의식화시키러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에 가득한 눈초리를 받으면서 마을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고, 우리에게 일을 주겠다는 집도 없어서 이렇게 쌀이나 축내다가 돌아가는 것 아니냐고 걱정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여름철이라 일손이 워낙 급했던지 하루 이틀이 지나자 이집 저집에서 일을 도와줄 학생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우리는 농사일에 능숙한 시골 아낙네처럼 몸빼 바지에 수건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난생 처음 잡아보는 호미자루를 휘두르며 열심히 일을 했다.

한참 동안 밭을 매다보면 이마에서 흐른 땀이 눈으로 들어가 따갑기도 하고 허리도 아프고 다리가 저려 힘이 들기도 했지만, 일을 마친 다음 말끔해진 밭고랑을 바라보며 땀을 식히는 기분은 그만이었다. 나뭇잎이 살짝 흔들릴 정도의 바람도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새참으로 먹던 찐 감자와 바가지에 담아 내온 겉절이 김치는 또 얼마나 맛있던지. 아직도 그때 먹어 본 분이 하얗게 나고 파삭한 햇감자의 맛을 생각하면 군침이 돈다.

강의보다 소중한 기억

농촌을 돕겠다고 떠났지만 막상 큰 가르침을 받은 것은 우리들이었다. 성실하고 정직한 농부들의 모습, 순박하고 자연친화적인 시골의 생활방식을 보면서 모든 것이 갖추어진 도시에서 편안함만 추구하며 살아온 우리의 생활이 얼마나 교만하고 게을렀던가 돌아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비록 그 이후 농사일을 할 기회는 없었지만 홍수가 나거나 가뭄피해 소식을 들을 때마다 한 여름 뙤약볕 아래서 땀 흘려 일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을 보면 농활의 기억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는 모양이다.

내 인생 최초로 땀 흘리는 노동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던 농활은 대학시절 들었던 어떤 강의보다도 기억에 남는 소중한 수업이다.


이유정 민변 과거사위원회 위원장

이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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