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망치로 철학을 한다”

철학여행까페[60]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9.02.09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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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 있는 마차 대기소에서 마부가 말을 때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마른 체구의 한 남자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광장을 가로질러 달려 가 그 말의 목을 껴안고 울부짖었다. 그리고는 고통 받는 말을 껴안은 채 곧 정신을 잃고 광장에서 쓰러졌다.

이동희
뭉크가 그린 니체
그가 쓰러지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 광경을 보러 나온 사람들 중에 그를 알아보고 깜짝 놀란 사람이 있었다. 하숙집 주인이었다. 하숙집 주인은 그를 데리고 집으로 데려갔다. 그는 오랫동안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하숙집 주인은 그가 의식을 찾게 의사를 불러 왔다. 의식에서 깨어 난 이 남자는 처음에는 노래를 부르고, 고함을 치고 갑자기 피아노를 쾅쾅 두드려 댔다. 하숙집 주인이 경찰을 부르겠다고 하자 겨우 조용해졌다.

조용해 진 그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디오니소스이자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서 왔음을 알리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친구인 브란데스에게 그는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자네가 나를 처음 찾아 온 이후로 나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네. 지금 어려운 일은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네…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그리고 가까운 친구인 오버베크에게도 이런 편지를 보냈다.

“지금까지 자네는 돈을 갚을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 왔지만 나는 빚은 갚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네. 예를 들면 자네에게… 나는 방금 반유대주의자들을 사살해 버렸다네… 디오니소스.”
정신 착란 상태이기는 하지만 자신을 디오니소스이자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 부르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 사람은 바로 철학자 니체였다. 그는 말년에 정신병을 앓아 혼란스러운 의식을 가졌다.

말년에 정신병을 앓은 니체

혼란스러웠지만, 니체는 ‘디오니소스’의 정신을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힌 자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것이 자신이라고 보았던 것 같다.

니체는 원래 철학 전공자가 아니었다. 그는 정식으로 철학을 공부한 일이 없다. 그는 주로 그리스 고전문헌학을 공부했고, 이 방면에 천재적 소양이 있어 20세 중반의 젊은 나이에 바젤대학의 전임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고전문헌학자라기 보다 이미 철학자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그가 27살에 저술한 <비극의 탄생>은 고전문헌학의 입장에서 그리스 비극을 해석한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그리스 문화의 원초적 힘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조화로운 융합에 있으며, 이것이 그리스 비극에서 종합되어 나타났다고 썼다.

이동희
질스 마리아의 니체의 집

여기서 아폴론적인 것은 적절한 질서를 갖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뜻하며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감성적이며, 도취적이며 열광적인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 비극의 몰락은 시작된 것일까?

그는 소크라테스에 의해 구체화된 그리스 이성 철학이 등장하면서 유럽의 정신은 아폴론적인 것이 지배하게 되었고, 디오니스적인 것이 사라졌다고 본다. 그러므로 그리스 비극에 나타난 조화로운 융합도, 그로부터 나오는 원초적인 힘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니체가 주장하듯이 유리피데스는 이미 소크라테스를 그런 사람으로 평가한 적이 있다.

“그를 통해 이야기되는 신성이란 디오니소스도 아폴론도 아니고, 소크라테스라고 불리는 완전히 새로 태어 난 악마이다.”

이동희
바그너
디오니소스적 철학에 매료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이 지배하는 이성철학이 쌓아 올린 벽을 망치를 들고 때려 부수려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망치를 든 철학자로 묘사했다. 젊은 니체의 반이성적인 성향은 그를 쉽게 쇼펜하우어 철학에로 이끌어 갔다.

그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것은 바그너의 역할도 크다. 젊은 니체는 바젤로 옮기 전부터 바그너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는 바젤대학의 교수로 와서 시간이 날 때 마다 자주 바그너를 방문했다.

니체가 바그너에 애착을 더욱 갖게 된 것은 바그너도 쇼펜하우어에 애착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쇼펜하우어가 ‘예술’에서 구원을 찾은 것도 그들을 감탄시켰다. 니체가 쇼펜하우어를 알기 전부터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바그너와 니체는 나이 차가 컸지만 곧 친구 사이가 되었다. 니체는 바그너를 만나고 와서 기쁨에 가득 차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이동희
쇼펜하우어
“나는 쇼펜하우어가 말한 ‘천재’의 상을 그대로 체현하는 사람을 발견했네. 더욱이 그는 놀랍도록 강렬한 철학, 즉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푹 빠져 있네. 그는 바로 리하르트 바그너일세.”

쇼펜하우어 동경과 비판

니체는 여러 점에서 쇼펜하우어의 주장에 동의했다. 우리의 삶은 고달프며 무의미한 것이며 우리가 의지라고 부르는 비합리적인 힘에 따라 움직인다는 주장에도 동의했다. 그러나 니체는 이 세계를 거부하고 외면하며 떠나야 한다는 쇼펜하우어의 결론은 거부했다. 오히려 그는 이 세계를, 그리고 우리의 삶을 그 자체로 충실하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니체는 세계를 외면하면서도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았던 쇼펜하우어를 비웃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바그너와도 결별했다. 그가 바그너와 결별하게 된 계기는 복합적인 것이었다. ‘자유 사상’에 마음을 사로잡힌 당시의 니체는바그너의 음악이 그리는 튜튼적이고 신화적인 ‘바이로이트 이념’을, 그리고 지배적이 되어가는 바그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는 바그너에 반대하는 <바그너의 경우>, <니체 대 바그너> 2권의 책을 썼다. 그는 <바그너의 경우>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바그너는 다만 내가 앓았던 병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 병에 감사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철학자는 바그너 없이 지낼 수 있다.”

이제 바그너와 쇼펜하우어로부터 독립한 철학자인 그의 손에는 여전히 망치가 들려 있었다. 그는 기존의 도덕과 가치를 향해 가차 없이 그 망치를 휘둘렀다.<다음 호에 계속>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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