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미국의 예를 따르자는 사대주의적 주장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표현의 자유가 절대적으로 보장되는 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미네르바 사건이라는 야만적 폭력이 우리의 현재를 규정하는 현실이라는 점은 전혀 도외시한 채 말이다.
이 논쟁은 연쇄살인사건이 야기한 사회적 충격이 상업화되는 과정을 그대로 반영한다. 인면수심의 흉악범을 눈앞에서 대면해야 하는 대중들이 받는 불안과 스트레스가 언론사의 기사 팔아먹기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이다.
연쇄살인과 같은 흉악범죄에 직면하게 되면 누구나 이런 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을 느낀다. 혹은 그러한 반인륜의 행위에 대한 분노와 그에 이어 사회적 경각심과 각성이 요청됨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의 불안은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치안서비스로 해소되어야 하는 것이 정답이며 언론의 역할은 이런 정책수단을 이끌어내기 위한 여론을 형성하는데 집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메이저 언론사들의 지면편집은 대중들의 이런 충격을 집단분노와 ‘벗겨라, 죽여라’의 복수심으로 가공하기에 여념이 없다. 보다 자극적이고 보다 감각적인 소재로 사건의 본질을 가리고 이를 사회방어라는 말로 그럴 듯하게 포장한다. 흉악범의 인권은 다른 이의 인권만큼 소중하다는 헌법정신은 물론 피의사실의 공표를 금지하는 형법이나 보험을 비롯한 금융정보의 공개를 막는 금융실명제법의 규정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보다 더 무서운 사실은 이 논쟁에 깔려 있는 야경국가에의 꿈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회 전체의 집단공포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권력의 무한확장을 도모하고자 하는 음모가 문제라는 것이다. 피의자 인권의 맞은 편에 잠재적 피해자의 인권이라는 신조어가 배치되고 있음은 그 뚜렷한 징표가 된다. 이들은 누구나 이런 범죄의 희생자가 될 수 있는 만큼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피의자의 인권은 희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혹은 그러한 피의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언론권력이나 국가권력은 정당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 우리는 이런 야만의 폭력을 수없이 목격하였다. 북한이라는 공포는 군사정권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낳았고, 테러라는 공포는 국민에 대한 무차별적인 감시체제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악플이라는 공포가 사이버모욕죄라는 야만적 국가폭력을 만들어내었다. 안전의 보장이 최상의 가치로 여겨질 때마다 사회는 병영화되고 군사화되며 그렇게 무한확장되는 권력을 비판하는 자는 언제나 적으로 간주되어 형사처벌에 처해진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조연현의 말처럼 “인간의 윤리와 민주주의를 함몰시키면서 감옥의 전성시대를 열었”던 과거가 재구성된다.
물론 현 시점에서의 공포는 과거와 같이 정치권력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의 종착점은 자본의 이익이다. 외환수급에 혼란을 초래해 공익을 해쳤다는 미네르바라는 공포는 친자본적 정권의 실체를 보호하는 수준에서 마무리된다. 통행인의 안전과 교통을 위협하는 화염병과 새총이라는 공포는 결국 뉴타운 개발 주체의 이익에 봉사하는 수준에서 정리되어 용산참사로 끝이 난다.
심지어 경제위기라는 공포는 공영방송을 민간재벌의 수중으로 이전하는 수순으로 진행된다. 이런 저런 공포는 실체도 없이 떠돌면서 그 공포를 다스리는 국가권력의 무한확장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20대80의 구도조차도 아쉬울 정도로 악화되어 가는 부의 집중을 결과한다.
요컨대 작금의 얼굴 공개 주장의 얼개는 현 정권이 줄기차게 주장해온 법질서 확립의 논리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아니, 연쇄살인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빌미로 이 법질서 확립론의 새로운 버전을 써 나간다. 9.11 테러 이후 미디어가 테러의 공포를 재구성하고 이를 다시 대중적 분노로 변형시킴으로써 이라크 전쟁과 관타나모 수용소로 대변되는 미국의 국가적 폭력이 탄생하듯, 오늘의 연쇄살인사건과 미디어의 관계는 그대로 한국의 국가적 폭력을 재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혹은 9.11의 확대재생산과정에서 신자유주의의 세계지배가 확고해지듯, 이 흉악사건의 확대재생산을 통해 한국의 천민자본주의는 또 다른 안식처를 찾아 나선다. 야경국가를 향한 집단최면을 등에 업고 말이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한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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