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독재 보도지침 떠올렸다”

‘보도지침’ 폭로 김주언이 본 청와대 ‘홍보지침’ 김주언l승인2009.02.19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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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환생… 반동의 시대 언론 제자리찾기 절실
‘보도지침’ 당사자가 본 ‘홍보지침’, 그리고 여론조작


언론을 이용한 여론조작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정권의 가장 유용한 통치수단이다.

정권에 불리한 사건을 오히려 유리한 여론으로 조작해내는 ‘스핀 닥터’(Spin Doctor)가 중요시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 독일의 괴벨스는 가장 악명 높은 스핀 닥터였다. 여론조작은 세계사의 흐름을 변화시킬 만큼 위력을 가지고 있다. 미국 레이건 행정부 최고의 스핀 닥터였던 칼 로브는 정보를 조작하여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했다.

민주주의 국가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미국에서도 여론조작은 다반사로 이용돼왔다. 레이건 행정부가 이라크 침공 명분으로 내세운 대량살상무기도 CIA의 정보를 악용한 여론조작에 다름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결정한 윌슨 행정부는 크릴위원회로 불리는 선전위원회를 만들어 참전을 합리화시켰다. 크릴위원회는 발족한 지 6개월도 안 돼 평화 지향적이었던 국민을 광적인 전쟁지지자들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대중은 독일이라면 치를 떨고 독일인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어 했으며 당장이라고 유럽으로 달려가 독일의 손아귀에서 세계를 구하고자 참전의 열의를 불태웠다.

미국의 유명한 진보학자인 노엄 촘스키는 저서 ‘미디어 컨트롤’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미 행정부는 같은 수법으로 이른바 빨갱이 소동을 일으켜 노동조합 파괴공작을 펼치고, 언론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 같은 골치 아픈 문제를 단숨에 해치워 버렸다. 특히 ‘모호크 밸리 수법’(Mohawk Valley formula)으로 불리는 새로운 선전기술은 노조의 파업을 무력화하는 단골메뉴로 자리 잡았다.

기업이 노조를 직접 공격하지 않고 미디어를 통해 ‘파업은 모두에게 해롭다’ ‘그들은 국민화합을 분열시킨다’는 단순한 메시지를 유포하고 아메리카니즘 같은 공허한 개념에 호의적인 여론을 조성함으로써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여론 장악의 메커니즘

국내에서는 과거 독재정권 시절 나치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이 악용했던 보도지침으로 여론을 조작했다. 보도지침은 있는 것을 없게, 없던 것은 있게 만들고 작은 것을 크게, 큰 것은 작게 만드는 요술방망이와도 같은 존재였다. 성고문을 당한 여학생을 졸지에 ‘성을 혁명 도구화하는 운동권 학생’으로 탈바꿈시키고, 생존권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은 사회분열을 획책하는 폭동이 되었다. 더 나아가 군사정권은 여론조작을 통해 김대중 납치사건을 호도하기 위해 ‘극일’(克日) 여론을 조성하고, 북한의 금강산댐을 ‘수공’(水攻) 위협으로 탈바꿈시켰다.

독재정권의 보도지침이 이명박 정부 들어 새로운 모습으로 환생했다. 청와대 행정관이 이메일 ‘연쇄살인범 홍보지침’을 경찰청 홍보담당관에게 보낸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홍보지침은 “용산 참사로 빚어진 경찰의 부정적 프레임을 연쇄살인사건 해결이라는 긍정적 프레임으로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언론이 경찰의 입만 바라보고 있는 실정이니 계속 기사거리를 제공해 촛불을 차단하는 데 만전을 기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되어 있다.

이 사실을 폭로한 오마이뉴스 보도를 보면서 악명높은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을 떠 올린 것은 나 뿐만은 아닌 것 같다. 1986년 우연히 편집국에서 보도지침을 모아 놓은 서류철을 보고 전두환 정권의 간악한 언론통제 실상에 경악하고 이를 폭로하기로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이 활동사진처럼 눈에 그려졌다. 박종철이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던’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고, 서대문 구치소 독방에서 지내던 6개월여 동안의 고통스런 감옥생활과 정권이 세 차례 바뀌는 9년여 동안의 기나긴 재판과정이 떠올랐다.(졸저 ‘한국의 언론통제’ 리북, 2009년 참조) 그동안 대한민국은 6.10시민항쟁을 통해 민주화를 이룩했고,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립된 것처럼 보였다. 언론의 권력화를 우려할 만큼 언론 자유는 만개했다.

사진=민주언론시민연합
야 4당과 시민사회단체가 공동주최하는 2월 국회 쟁점법안 연속토론회 중 하나인 언론관계법안 토론회가 지난 17일 국회도서관 소회의실에서 ‘언론관계법 제개정과 민주주의 위기’란 제목으로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어쩌랴. ‘잃어버린 10년’을 외치며 정권을 장악한 이명박 정부 들어 또 다시 보도지침의 악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단지 10년 전이 아니라 20년 전인 전두환 시대로 세월을 되돌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에는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직접 전달하여 여론을 조작했다. 철권통치를 앞세운 전두환 정권은 신문과 방송의 입만 틀어막으면 쉽게 여론을 조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터넷 등 뉴미디어가 보편화한 세상이다. 아무리 강압책을 쓰더라고 인터넷을 제압할 수는 없다. 이메일 홍보지침도 인터넷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그래서 등장한 것이 청와대의 이메일 홍보지침이다.

홍보지침에 등장한 여론조작 수법은 매우 구체적이다. 연쇄살인 사건 담당 형사 인터뷰, 증거물 사진 등 추가정보 공개, 드라마 CSI와 경찰청 과학수사팀의 비교, 사건 해결에 동원된 경찰관, 전경 등의 연인원, 수사와 수색에 동원된 전의경의 수기 등 ‘적극적인 컨텐츠 생산과 공조’를 부탁했다. 이를 통해 경찰에 대한 ‘부정적 프레임을 긍정적 프레임’으로 바꾸도록 유도한 것은 조지 레이코프의 ‘프레임 이론’을 활용한 현대적인 여론조작 방법이다. 홍보지침을 내려 보낸 청와대 행정관은 새롭고 흥미로우며 엽기적인 사건을 쫓아가는 언론의 상업주의적 속성을 잘 아는 스핀 닥터라고 할 수 있다.

언론 상업주의 속성 간파

이에 대해 민생민주국민회의(준)는 “살인마를 이용하여 용산 참사를 덮기 위해 보도지침을 내린 청와대의 언론조작의 실체를 밝히고 관련 책임자를 엄중 처벌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며 “연쇄 살인범에 대한 보도를 확대하여 용산참사 수사결과에 쏠린 국민적 의혹을 호도한 것은 그 자체로서 인면수심의 극악범죄”라고 규탄했다.

그러나 청와대는 꼬리 자르기로 일관하고 있다. 용산 참사에 대한 검찰의 수사 결과가 발표된 뒤 민주당 김유정 의원이 용산참사 홍보지침 제보를 받았다고 밝혔다. 청와대는 처음에 부인했으나 다음 날 시인했다. 청와대는 개인적으로 저지른 잘못이어서 ‘구두 경고’만 했고 이메일 홍보지침을 내려 보낸 행정관은 사표를 내고 청와대를 떠났다. 중대한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모자라서 국민에게 거짓말까지 하고, 거짓말로도 모자라서 국민을 희롱한 셈이다.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1주일 동안 두문불출하다가 경위 설명이나 해명도 없이 “이제 그만 논란을 접자”는 식의 ‘뭉개기’로 일관했다. 한승수 총리도 “행정관이 사표를 낸 것으로 이 문제는 일단락됐다”고 말했다.

홍보지침 사건은 이대로 묻혀버릴 사안이 아니다. 아직 실체적 진실은 전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여론호도 이메일’의 배후로 청와대 박형준 홍보기획관과 정정길 대통령실장까지 거론했다. 오마이뉴스는 제보자가 “청와대 이메일 지침은 일개 행정관의 아이디어 전달이 아니고 청와대 홍보기획관실에서 지난 해 12월부터 촛불에 대응하기 위해 마련한 여론조작 시스템”이라고 주장했다고 밝혔다.

참여연대는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민주당 의원들은 청와대의 업무 운영체계와 운영서버 시스템 상 상부의 보고와 승인 없이 이메일을 보낼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면서 “이성호 국민소통비서관실 행정관이 상급자인 박형준 홍보비서관 및 김철균 국민소통비서관의 결재와 정정길 비서실장의 승인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주장했다.

국민도 이메일 홍보지침을 여론조작 시도로 보고 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의 여론조사(전국 성인남여 1천명)에 따르면, 57.2%는 ‘사실상 여론조작 시도로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응답했고 ‘청와대 행정관 개인의 돌출행동으로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다’는 의견에는 27.3%가 동의했다. 청와대의 ‘뭉개기’가 약발이 먹히지 않고, 청와대 해명에 설득력이 없다는 뜻이다.

“이제 시작일지 모른다”

군사정권 시절 보도지침을 지키지 않으면 담당기자는 물론 언론사 경영진까지 정보기관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현 시점에서 이러한 공포감 조성은 잘 먹혀들지 않는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는 국정원법을 개정해 언론을 사찰을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언론이 청와대의 홍보지침 대로 보도했다는 점이다. 언론은 경찰의 보도자료를 받아쓰기에 급급했다.

언론은 연쇄살인범의 얼굴을 공개하면서 현장검증 등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했지만 용산에서 처절하게 숨져간 철거민 문제는 침묵했다. 일부 언론은 철거민을 ‘도심 테러리스트’로 규정했다. 또 건축주의 재산권만 보호해주고 철거민의 생존권은 외면했다.

정권의 어떠한 여론조작도 언론이 호응하지 않으면 위력을 발휘할 수 없다. 어느 때보다 언론의 각성이 요구된다. ‘반동화 시대의 언론 제자리 찾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보도지침 사건이란?=김주언 편집인은 한국일보 기자시절 보도지침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1985년 10월 19일부터 1986년 8월 8일까지 10개월 동안 시달된 584개 항의 보도 지침 내용을복사해말지에 넘겨주었다. 말지는1986년 9월 6일 특집호로 '보도지침―권력과 언론의 음모'를 기사화했고 9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공동으로 명동성당에서 보도지침 자료공개 기자회견을 열었다.

보도지침에서는 ‘가, 불가, 절대불가’ 등의 구분을 통해 각종 사건이나 상황, 사태 등의 보도여부는 물론 보도 방향과 내용, 형식까지 구체적으로 결정해 시달함으로써 사실상 언론의 제작까지 정부기관이 전담하는현상이 벌어졌다. 보도지침에 충실하게 따랐던 언론사는 취재한 기사의 비중이나 보도가치와는 상관없이 신문·잡지를 발행함으로써 대중조작이 끊임없이 되풀이됐다.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는 계엄하인 1980년 11월의 언론기관통폐합에 이어 12월 언론기본법을 제정하여 언론통제의 기초를 마련하고, 일상적으로 언론을 통제하기 위해 계엄하의 언론검열단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으로 문화공보부 산하에 홍보조정실을 신설하였다. 그러나 홍보조정실은 형식적인 부처로, 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사실상 보도지침 등의 모든 언론에 대한 내용은 대통령 정무비서실에서 결정되어 통보됐다고한다.

보도지침 폭로 이후 12월 10일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사무국장 김태홍 씨가, 12일에 실행위원 신홍범 씨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되어 구속되었다. 김주언 편집인은 15일 대공분실로 연행되었고 17일 구속됐다.검찰은 세 언론인을 국가보안법 위반, 외교상 기밀 누설, 국가 모독,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을 들어 기소하였다.

종교 단체와 민주 단체 등은 항의 성명을 발표하고 석방 운동을 벌였다. 사건은 국외에도 알려 영국의 인권 단체 엠네스티와 미국의 언론 단체 언론인보호위원회도 정부에 서한을 보내고 석방을 요구했다. 김태홍, 신홍범, 김주언 편집인은 1987년 6월 3일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김주언 편집인

김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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