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 아닌 심판이다

황정아 문학평론가l승인2024.06.02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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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총선의 결과를 이야기할 때 가장 자주 등장한 표현은 ‘야권의 승리’이지 싶다. 야권에 어느 당까지 포함되는지, 또 승리가 얼마나 압도적인지를 두고서는 의견이 갈리기도 한다. 정작 야권에 투표한 이들 다수는 대통령의 거부권을 무력화하고 필요하다면 탄핵이나 개헌까지 밀어붙일 200석에 못 미친 점이 아쉬운 나머지 선거 직후만 해도 이긴 것 같지 않다는 기분을 털어놓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이겼다는 사실이 차츰 실감되면서는 무엇보다 승리의 진짜 주체가 누구인지 곱씹게 된다. 누가 나를 지지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나를 지지하게 만들 것인가에 후보자보다 더 열렬히 집중했던 유권자들이야말로 주체의 자격에 부합한다.

선거의 본뜻이 당선을 향한 게임이 아니라 민의의 관철을 위한 수단임을 분명히 일러주겠다는 듯 공천부터 선거운동 전과정에 주도권을 행사한 이 사람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누군가의 얌전한 ‘동료시민’이 아니라 흩어져 밝히다가도 때가 되면 무섭게 함께 타오르는 ‘촛불시민’이 그 가장 합당한 이름일 것이다.

승리의 실감보다도 늦게 오는 것이 패배의 실감이라는 사실을 총선 이후 이 정권의 행태에서 알게 된다. 벼랑 끝인 줄 모르고 허공으로 몇걸음 내딛다 보기 좋게 추락하는 만화 속 악당처럼, 얼마나 드라마틱한 퇴장을 보여주려고 이러나 싶게 버티는 중이다.

일찍이 아도르노(T. Adorno)가 ‘진정한 진보는 퇴행처럼 보인다’고 했다는데, 오늘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진정한 퇴행이 진보의 옷을 걸치는 장면이다. 이 정권은 소통이니 협치니 하는 얼핏 정당해 보이는 말들로 선거의 가장 선명한 메시지였던 ‘정권심판’을 지우려 한다.

“어떤 문제와 관련된 일이나 사람에 대하여 잘잘못을 가려 결정을 내리는 일”이라는 ‘심판’의 뜻풀이에서 핵심은 결정, 다시 말해 분명히 정한다는 데 있다. 잘잘못을 그저 지적하고 따지는 ‘비판’과의 해석적 차이도 그로부터 비롯되는데, 이제 그만 끝내라는 이번 결정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한 소통이든 협치든 퇴행에 다름 아니다. 이른바 영수회담이나 기자회견에서 드러났듯 기만의 제스처조차 제대로 해낼 실력이 이 정권에 없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진보와 퇴행의 뒤섞임은 의외의 영역에서도 목격된다. 이번 선거를 통해 운명이 갈린 또다른 당사자가 대표적인 제도권 진보의 계보를 이어온 정당이었다는 사실은 오래 돌이켜볼 대목이다. 운명까지는 아니라도 평판과 위상의 하락이라는 면에서 제도권 진보언론 역시 유사한 경로를 밟는 듯 보인다.

이런 사태가 빚어진 데는 결정을 내리지 않는 위치가 진정한 진보의 자리라는 생각, 어떤 결정도 나쁜 결정일 수밖에 없으니 모든 결정을 비판하는 일이야말로 유일하게 정당하다는 생각이 있는지 모른다. 결정이 현 상태에 순응하는 수동적 행위라는 잘못된 전제는 현 상태 내부의 차이를 묵살한 채 이쪽이나 저쪽이나 결국 마찬가지라는 냉소를 조장한다.

여기까지는 늘 있어온 일이지만, 특히 촛불혁명을 거치며 결정을 통해 차이를 벌리고 그 틈으로 변화를 만드는 시민들의 주권적 행위가 전면에 나서면서 ‘진보적’ 냉소는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자신의 비판이 갖는 정치적 위상을 높일 수 있다면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부인하기에 이르고, 일부는 심지어 실제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편을 선호하는 기색마저 역력하다.

브루노 라뚜르(Bruno Latour)는 비판의 정당성이 위기에 처했다고 지적하는 글(“Why Has Critique Run out of Steam? From Matters of Fact to Matters of Concern”, Critical Inquiry, Winter 2004)에서 비판적이기만 하다면 언제나 옳다는 분위기를 조성한 “비판적 야만성”(critical barbarity)을 위기의 한 원인으로 지목한다. 이때 ‘비판적’이라는 말에는 비판의 온갖 기제를 현란하게 휘두르는 기술과 얌전히 접어두는 기술이 모두 포함되는데, 흥미롭게도 이는 기소독점권을 쥔 검찰의 행태와 유사하다.

비판(또는 기소)을 구사하거나 삼가는 자의적 선택으로 모든 상대를 잠재적 비판대상으로 ‘평평하게’ 만들어 사태를 오히려 혼탁하게 만드는 한편 자신의 올바름만큼은 우뚝 서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라뚜르가 묘사한 서구의 경우 퇴행세력이 진보의 비판 기술을 베껴 더 강력하게 구사하는 바람에 문제가 부각된다면, 우리 사회는 촛불시민의 한발 나아간 정치적 행위 덕분에 비판의 ‘퇴행성’이 드러난다는 차이가 있다. 비판의 자기혁신을 위한 기회는 이런 차이에 주목하는 데 있으리라 본다.

지난 총선에서 ‘정권심판’만큼 주목받은 구호는 ‘3년은 너무 길다’였다. 이 구호의 주된 매력은 단연 그 통쾌함이었으나 선거가 끝난 지금은 3개월 아니 3주도 너무 긴 것 같은 느낌이다. 심판은 내려졌는데 어떻게 집행할지 정해지지 않은 데서 오는 조바심이다.

그럼에도 채상병특검법을 비롯하여 여러 특검법의 추진이 본격화되는 등 정치권에서 심판의 결정에 응답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정권의 조기종식을 공공연히 거론하는 흐름이 주류가 되고 있다.

선거 결과가 사태를 분기점 가까이로 끌고 갔으니 각각의 실천에 잠재된 폭발력도 커져 이제 어느 지점이 발화점이 되어도 놀랍지 않다. 어떤 퇴행 시도도 끝내 되돌리지 못할 우리 사회의 단단한 변화를 이번 선거에서 다시금 확인하면서 ‘상상의 공동체’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된다.

민족이나 국가의 근거 없음을 비판하는 데 쓰였던 이 말은 사실 촛불시민들이 실행하는 ‘나라다운 나라 만들기’를 가리키는 데 더없이 적절하지 않을까? 우리가 느끼는 조바심은 이 상상을 더 크고 자유롭게 펼치고 싶은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황정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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