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합의기구의 조건

[편집인 레터] 김주언l승인2009.03.05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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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미디어산업의 구조개편을 위해 새로운 법제를 만들 때는 의회 또는 정부 산하로 사회적 합의기구를 구성하여 국민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했다. 미국의 허친스위원회를 비롯하여 영국의 왕립위원회, 독일의 귄터위원회, 스웨덴의 언론위원회 등 사회적 합의기구는 새로운 이론과 제도를 제시함으로써 민주적 정책 수립에 기여했다. 최근에는 프랑스에서 지난해 10월 ‘언론계 총회’(의장 에마뉴엘 미뇽)를 구성해 토론을 벌인 뒤 지난 1월 8일 의장 이름을 딴 ‘미뇽보고서’를 제출했다.

여야의 동상이몽과 기구의 역할

이들 사회적 합의기구는 미디어산업과 언론계 쟁점들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보고서를 작성, 제출하여 미디어정책 방향을 제안했다. 이들 기구는 법조계, 과학기술계, 인문사회과학계, 언론학계의 전문가와 시민단체, 미디어업계, 노조 등으로 구성해 이해당사자들 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합의를 이끌어냈다. 또한 국가의 정치, 경제, 문화 부문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미디어정책의 패러다임과 이론적 틀거리를 제시했다. 이러한 방법이 절차적 합리성과 대표성을 담보할 뿐더러 정책의 정당성과 신뢰성, 합리성, 효율성을 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야는 2월 임시국회 막바지 일촉즉발의 순간에 사회적 쟁점인 방송법, 신문법, IPTV법, 정보통신망법 등 4개 법안을 국회 문방위에 사회적 논의기구를 만들어 100일간 여론수렴 과정을 거친 뒤 국회법에 따라 처리키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 기구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양당은 동상이몽을 하고 있다.

우선 구성방식에서 한나라당은 10명 안팎의 최소인원을, 민주당은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규모를 주장한다. 역할과 기능에 대해서도 한나라당은 의견수렴을 위한 자문기구, 민주당은 실질적 의사결정기구로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는 여야 대표가 막바지 협상에서 충분한 논의과정 없이 서둘러 합의문을 작성했기 때문이다.

국회는 이제라도 사회적 합의기구가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외국의 선례에서 보듯이 사회적 합의기구는 광범위한 분야의 조사와 연구를 기본으로 한다. 포괄적이고 심층적인 미디어산업 현황에 대한 과학적인 조사가 없으면 다양한 집단의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기 어렵고 바람직한 정책을 마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적 합의기구는 충분한 시간을 갖고 활동해야 한다.

수년동안 활동은 다반사, 그래서 사회적 합의

외국의 경우 몇몇 위원회는 활동기간만 2~3년에 이르기도 했다. 1944년 2월 28일 출범한 미국의 허친스위원회는 3년 동안 활동한 뒤 1947년 3월 27일에야 ‘자유롭고 책임있는 언론’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영국의 왕립위원회는 1947년부터 1977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활동했다. 독일의 귄터위원회도 1967년 구성돼 1년여 동안 활동했다. 100여일만에 뚝딱 해치워버리겠다는 한국의 ‘빨리빨리 위원회’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또한 국민여론을 사회적 합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해야 한다. 허친스위원회는 13명의 저명한 학자들로 구성됐다. 왕립위원회의 경우 1차는 문학자, 법학자, 학술원 회원 등 17명으로 구성됐고, 2차(5명), 3차(14명)로 넘어가면서 위원들의 수와 성격을 달리했다. 언론이나 정치권과 관계가 없는 명망가들로 선임하되 정치색 짙은 인사는 배제했다. 프랑스의 ‘언론계 총회’는 각계 인사 150여명으로 구성했으며, 100여 차례의 토론과 논의를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하여 국민의 여론을 수렴했다.

외국의 사회적 합의기구들은 언론사의 소유 집중에 따른 여론다원성의 위협을 공통주제로 삼았다. 그만큼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의 여론을 반영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근간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허친스 위원회는 소수 기업이 언론을 통제하는 데 우려를 표명하고, 신문시장이 일부 계층의 주장만 반영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왕립위원회도 신문의 소유 집중과 독점이 언론자유를 해친다며 규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귄터위원회는 신문사의 인수합병에 의한 시장점유율 제한을 논의했으나 합의하지는 못했다.

사르코지 대통령의 반응은?

이들 사회적 합의기구의 최종보고서는 단순히 자문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허친스 위원회 보고서는 사회적 책임이론을 담은 언론학 교과서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프랑스의 미뇽보고서는 신문방송 겸영확대 등 정부의 개정안에 반대하는 내용을 담았으나 사르코지 대통령은 이를 받아 들였다. 귄터위원회의 논의는 이후 1976년 개정된 연방독점법에 추가돼 신문사의 인수합병으로 시장점유율(판매부수 기준)이 20%를 넘으면 연방독점방지청에 신고하도록 했다.

여론다원성은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와 여당은 재벌과 ‘조중동’에 지상파방송의 겸영을 허용하려 한다. 한나라당은 재벌의 지상파방송 참여를 봉쇄하되 신문사의 지분참여는 보장해야 한다고 밝혀 조중동의 지상파방송 참여가 속내임을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여론다양성을 위한 것이며 일자리 창출을 위한 것이라고 고집을 피운다. 객관적인 조사에 근거한 과학적 분석도 없다.

사회적 논의기구가 기능과 역할을 다하려면 외국의 경우처럼 과학적인 조사와 자료를 토대로 다양한 계층의 여론을 수렴하여 정책과 법률에 반영해야 한다. 그래야만 정권 차원이 아닌 국가 차원의 바람직한 미디어 정책과 법제가 마련될 수 있다.


김주언 편집인

김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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