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이고 아침으로 떠나는

[이지상의 사람이 사는 마을] 이지상l승인2009.03.09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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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벽의 상상력이 좋습니다. 하루의 일과를 곱씹어보거나 그리운 이름을 떠올려 보거나 혹은 책을 읽거나 악보를 끄적 거릴 때, 새벽의 고요가 가져다주는 마음속의 풍경은 마치 도화지 같아서 나는 늘 새벽의 풍요위에 상상의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간혹 여명(黎明)을 창으로 불러 함께 아침을 맞이하기도 하는데, 그때는 농익은 살구, 새벽비에 떨어지듯 현관을 ‘툭’ 치고 바삐 돌아서는 신문 배달부의 부지런한 생산력에 감사하거나 우는 듯 혹은 웃는 듯 새벽 골목을 헤매는 폐지 줍는 사람들의 손수레 끄는 소리를 리듬처럼 듣고 난 후 일겁니다. 지금까지 나의 부족한 창작물은 새벽의 고요가 부화시킨 어린 생명과 같은 것이므로 새벽은 나에겐 중요한 생산 수단이기도 한 셈입니다.

밤새 침침해진 눈자위를 식히려 집밖으로 나서면 차가운 새벽바람을 타고 하루일과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간간이 보입니다. 부지런한 학생은 벌써 자전거를 타고 내 앞을 휑하니 지나가고, 새벽잠 설친 여인은 어깨에 걸친 핸드백을 들썩이며 버스정류장으로 향합니다.

길가 에서 채소를 파는 할머니 손엔 물건을 떼어 담을 큰 보자기 뭉치가 들려있고, 인력시장으로 가는 초췌한 노동자는 공구가방을 들고 있습니다. 전날 막차를 나와 같이 타고 온 중년의 아주머니는 어제와 똑같은 무표정으로 정류장에 서있습니다.

생각보다 일찍 오는 막차를 놓치지 않았으니 마음보다 앞서가는 첫차도 놓이지 않으리라 다짐하듯 하루라는 생의 끈을 붙잡고 어둠 걷히는 새벽을 열어 초록 봄날의 언덕으로 향하는우리 민초들의 초상이 거기에 있습니다. 경건한 의식을 치루는 듯 아직 오지 않는 첫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버스 정류장을 지나가면 아직도 새날을 준비하지 못하고 잠 들어야하는 나의 게으름을 탓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둠이 채 가시기 전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골목안쪽에서 그분을 만났습니다. 흩어져 있는 지난밤의 흔적을 가지런히 정리하듯 청소부가 남기고 간 빈 박스와 폐지를 담고 있는 노인입니다. 리어카에는 읽다 만 듯 한 구겨진 신문지와 대형마트 광고지가 차곡차곡 쌓여있습니다. 고장 난 컴퓨터 모니터도 한 대, 그리고 애들이 버린 학습지와 책 몇 권은 따로 쌓아두었습니다.

아마도 함께 사는 손자에게 보여줄 심산인가 봅니다. 가로등의 흐린 조명은 겨우 손수레의 반쯤을 비추고 있고, 노인은 골목안쪽으로 사라졌다가 이내 한 아름의 폐지를 안고 돌아옵니다. 넓직한 리어카에 수북이 폐지가 쌓인걸 보면 노인은 새벽이 오기도 전에 일을 시작하신 듯합니다.

‘당신이 끄는 손수레엔 새벽이 가득 실려있고, 그 안엔 빈병과 폐지와 먹다남은 피자도 있고/당신은 우는 듯 어두운 골목길 서성이다, 당신은 웃는 듯 새벽을 향해 걸어가다.간밤에 세상이 토한 추한 흔적들을 밟고 서서, 수척한 그 어깨 위로 세상의 아침을 주워담고/세상의 한 복판에서 길을 잃은 노인처럼, 두리번두리번 거리다 또 폐지를 찾아 걸어가다/그랬어 당신은 나의 고단한 새벽을 깨우는, 그랬어 당신은 나의 지친 일상을 뒤흔드는 사람’(이지상 작, 폐지줍는 노인)

폐지 줍는 노인

한때 국제 원유가격이 배럴당 140달러이상 치고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각종 원자재 가격도 전년대비 40%이상 동반상승하고 이어 MB정부가 특별 관리 한다던 서민소비재 물가도 많게는 2배 이상 뛰었습니다. 양복에 계란, 하다못해 돼지고기, 소주까지 서민물가 관리품목이라고 명시해 놓은 것도 답답한 일이지만 그나마도 관리가 되질 않으니 여간 살기 버거운 게 아닙니다.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6.7%라고 하면 잘 와 닿지 않지만 밀가루 1포대 값이 1만천원에서 2만3천원으로, 식용유 1통이 2만6천원에서 4만원으로 올랐다고 하면 금방 체감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오르는 덕분에 폐지 값도 한때 kg당 140~200원까지 치솟은 적이 있어서 하루 종일 리어카로 몇 개쯤 고물상에 맡기면 많게는 2만원 정도의 수입을 얻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도 약 1/4 가격으로 급락 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진짜 서민들을 이따끔씩 만나면서 정부 정책의 기본은 “서민이 잘사는 나라”라고 설파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법인세율 완화, 출자 총액제도 폐지, 고소득자 소득세, 종부세 완화 등 친 재벌적, 친 부유층적 정책들만 현실화됨으로써 모두 가짜임이 탄로 나고는 했습니다. 굳이 무신물립(無信不立)이라는 공자님의 말씀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말씀만 하면 그 반대로 가는 신뢰할 수 없는 언사들 때문에 서민들은 점점 가는귀를 먹어가고 있습니다.

기초생활 보호대상자 160만 명, 절대빈곤층이 전체인구의 14.8%(700만 명)나 되지만 정부는 올해만 해도 기초생활보장 예산은 1천289억원을, 장애인 수당은 413억원이나 깎았습니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아들 때문에 기초생활 수급자 명단에서 제외된 78세의 할머니도, 전기값이 아까워 형광등 불빛도 켜지 못하는 소녀가장도, 시의 사회복지 예산 삭감으로 문을 닫은 공부방을 어슬렁거리는 어린아이도 정부에 대한 원망이 가득한데 대통령은 그저 “잘 되고 있다 희망을 가져달라”는 주문만 늘어 놓습니다. “경제도 어려운데 무슨…” 이라는 무차별적 언어폭력 앞에 국민으로써의 정당한 요구는 묵살당하기 쉽상입니다.

“경제도 어려운데…”

노인이 주워담은 저 새벽의 노동이 얼마의 가치가 있을까를 생각 합니다. 쌀 한 포대는 고사하고 라면 한 묶음. 양파 한단 정도 사면 맞아 떨어질 것 같은 분량이지만 노인의 발걸음은 골목 안 라일락 향기가 가장 짙은 집 대문에서 잠시 머물다 리어카와 함께 사라지고, 어둠을 빠져나가는 리어카의 빈자리는 뒤 늦은 아침햇살이 채웁니다.

오체투지의 간절한 기도로 라싸의 언덕을 오르는 티벳의 순례자로 인해 세계의 평화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처럼 새벽의 어둠을 켜켜이 쌓아 싣고 가는 노인의 손수레로 인해 골목에 아침이 온다는 것도 믿을 수 있습니다. 새벽을 이고 아침으로 떠나는 노인의 거친 이마에 맺힌 땀방울, 그 속에 비쳐진 여명의 영롱함을 한편의 시로 담지 않는다면 인간의 노동을 표현하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는 없는 것입니다.


이지상 가수,성공회대 외래교수

이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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