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스파이를 자임한 철학자 키에르케코르

철학여행까페[63]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9.03.09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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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코르의 초상화
키에르케고르는 1813년에 엄격한 개신교도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미카엘 페데르센 키에르케고르는 가난한 농부에서 부유한 코펜하겐의 시민이자 상인으로 성공을 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식 모두에게 물질적 안정과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신에 대한 죄의식에 시달리면서 살아왔다.

그는 기혼자로서 하녀와 관계를 가졌다. 물론 아내가 죽자 그는 이 하녀를 합법적으로 자기의 부인으로 삼았다. 이 부인에게서 난 자식이 키에르케코르였다. 그러나 키에르케코르의 아버지가 이 일 보다 더 평생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 사건이 있었다.

그가 소년이었을 때 가난에 절망한 나머지 유틀란트의 초원에서 신을 저주한 일이었다. 키에르케코르는 이 일에 대해 일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신을 부정했던 아버지

“한 남자에게 일어난 끔찍한 사건, 그 남자는 어린 시절 유틀란트의 황야에서 양떼를 지키면서 많은 어려움을 참아 내야만 했고, 굶주리고 있었으며 비참했다. 그는 언덕 위에 올라가서 신을 저주했다. 이 남자는 그가 82세가 되어서도 이 일을 잊을 수가 없다.”

가난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신에 대한 저주를 했지만 키에르케코르의 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경제적으로 성공을 한다.

신에 대한 저주를 한 사건 이후 그는 코펜하겐에서 목재상을 하고 있던 삼촌을 방문했다. 그때부터 사업이 번창하기 시작하여 죽을 때는 수도 코펜하겐에 5채의 집을 소유한 부자가 되었다.

1838년 아버지가 죽자 키에르케고르는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았으며, 그 덕분에 금전문제에 방해받지 않으면서 저술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키에르케코르의 아버지는 신에 대한 저주의 죄값을 치루어야만 한다는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식들도 이러한 죄를 속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러한 죄의 일부라도 씻어내기 위해 특히 뛰어난 재능을 가진 그의 막내 아들로 하여금 신학교육을 받도록 했다.

키에르케코르는 아버지로 부터 죄의식과 우울함 그리고 골똘하게 생각하는 경향을 물려 받았다. 그는 아버지가 신을 저주한 사건 때문에 가족과 그에게 벗어 던질 수 없는 저주가 시작되었다고 믿었다. 키에르케코르 자신을 제외한 6남매가 모두 일찍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도덕적 정신적 유산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17살이 되던 해인 1830년에 그는 아버지의 죄의식과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신학보다 철학에 관심을 기울이며 코펜하겐의 환락적인 사교장으로 향한다.

그는 옷에 지나치게 신경 쓰기도 했고, 카페나 극장을 열심히 드나들었으며 코펜하겐의 거리를 빈둥거리며 쏘다니기도 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시기에 그가 홍등
가를 방문했던 것 같다. 청년 키에르케고르는 도시에서 유명한 한량과 부랑아가 되려고 하였다.

그러나 1838년 아버지가 죽자 키에르케고르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신학 공부를 계속했다. 그는 신학 석사학위를 받고 레기네 올젠이라는 어린 소녀와 결혼을 할 생각이었다.

그는 1841년에 박사학위논문 <소크라테스와의 지속적 관계를 통해 본 아이러니의 개념> 을 제출하고 레기네 올젠과 약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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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에르케코르와 관련된 삽화들

“신 앞에 우리는 단독자”

그러나 지난 호에 언급한 것처럼 깊게 뿌리 내린 우울한 감정과 죄의식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자신이 과연 결혼해서 결혼 상대방을 위한 책임을 질 능력이 있는지 의심을 했다. 결국 1841년 10월에 약혼파기를 하고 그는 베를린으로 떠났다.

약혼녀 레기네와의 이별은 키에르케코르에게 평생 가슴 아픈 일로 남았지만 그는 이러한 아픔을 지속적인 창작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이 시기부터 키에르케고르는 신이 자신에게 특별한 역할을 부여했다는 의식을 갖는다. 다시 말해 ‘신의 스파이’로서 진정한 기독교의 정신에 귀를 다시 기울이는 것이다.

“나는 마치 가장 높은 분을 위해 봉사하는 스파이와 같다.”

그는 이 일을 위해 ‘조롱받는 순교자’가 되고 싶어 했다. 그는 작품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논쟁을 벌여 수많은 반대자를 갖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 대한 공개적인 비웃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국외자로서 사회적 관계와 출세를 포기한다.

‘신의 스파이’로서 그는 신과의 진지한 대면에 몰두한다. 그가 항상 가졌던 물음은 실존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신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였다.

키르케고르가 볼 때 신 앞에서 우리는 단독자이다. 우리는 신 앞에서 윤리라는 보편적 가치, 대중적 통념 등을 배제한 채 오직 자기 자신만으로 신 앞에 설 수 있다.

“한 인간이 완전히 자기 자신, 한 개별적인 인간, 이 특정의 개별 인간이 되는 것을 감행하는 것은 극히 중요하다. 이 모든 엄청난 긴장과 이 모든 엄청난 책임을 떠맡고 홀로, 신 앞에 홀로 서는 것 말이다.”

신 앞에 홀로 선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 알고,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은 익명으로 ‘무리’ 나 ‘대중’의 한 부분으로 살아 간다. 그는 신 앞에서 인간들이 자기 자신이 되려고 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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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기나 올젠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자기 자신이 될까? 키에르케코르가 볼 때 인간은 무한과 유한, 자유와 필연의 종합이자 둘 사이의 관계이다.‘종합’과 ‘관계’에 대해 인간은 의식적으로 관계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자아를 획득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 ‘종합’과 ‘관계’는 신과 나 사이의 관계를 말한다. 키에르케코르는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단순하게 주어진 과제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에 따라 실현할 수 있는 과제라 본다.

그는 인간이 신과의 잘못된 관계에 놓일 수 있고 따라서 자신을 상실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것을 그는 ‘절망’이라고 부르며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그러한 것을 기술했다.

키에르케코르는 지칠 줄 모르고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단독자가 되라고 요구한다. 또한 그는 기독교의 참모습을 알리는 대신 세속사회에서 안락을 추구하는 성직자들과 교회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했다.

그는 기독교의 진지함과 참된 진리를 배반한 덴마크 국교회의 수치스런 상황을 폭로하는 임무를 신에게 명령받았다고 생각했다. 1855년 그는 많은 양의 소책자와 팜플릿과〈순간〉이라는 잡지를 발간해 덴마크 국교회를 비판했다.

덴마크 국교회를 비판하는 일에 몰두한 나머지 그의 건강은 몹시 나빠졌다. 교회 비판 운동을 한 지 거의 2년이 지날 무렵 그는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 1개월 후 죽었다. 그 무렵에는 그의 재산도 거의 남은 것이 없었다.

‘나’와 신과의 관계

그는 소유하고 있던 몇 안 되는 귀중품을 그가 평생 사랑했던 여인 레기네 올젠에게 남겨 두었다. 당시에 그녀는 관리와 결혼하여 덴마크령 서인도제도에서 살고 있었다.

키에르케코르가 쓴 대부분의 저서들은 개인적인 문제와 체험을 바탕으로 삼아 객관화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 고백서라고 볼 수 있다. 저서들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인생의 여정>, <철학적 단편>, <불안의 개념>, <공포와 전율>, <죽음에 이르는 병>, <그리스도교 입문> 등이 있다.

이들 저서들 속에서 키에르케코르는 단독자로서 끊임없이 신과 자신과의 관계를 집요하게 탐색했다. 신과의 관계에 대한 의식은 그에게 고뇌였으며 그가 사는 동안 사람들 속으로 묻혀 들어 갈 수 없게끔 했다.

“나의 삶은 다른 사람은 알지도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는 하나의 끔찍한 고뇌다. 모든 것이 자만과 오만으로 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나는 나의 살 속에 가시를 가지고 있었다. 그처럼 걸리는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았고, 어떤 직장도 가질 수 없었다. 그 대신 나는 예외자로 남았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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