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살아 숨쉬는 라틴어

[책권하는 사회] 이우희l승인2009.03.19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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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서적 누가 찾을까? 알고보니 호황
‘원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재미 솔솔”

출판사 편집자들은 대개 기획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 책 만드는 틈틈이 ‘이런 책은 어떨까’ 또는 ‘이건 좀 팔리겠는걸’ 하는 생각이 출간으로 이어지곤 한다.

특히 외서는 책 꼴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외국 시장에서 한 차례 검증되었다는 점에서 계약을 위한 출판사 간 경쟁이 치열하다. 무엇보다 원고 때문에 저자와 씨름할 일이 잦은 국내서와는 달리, 외서는 돈 문제 빼면 그리 속 썩을 일도 없다.

그런 이유로 자주 외국 출판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책을 찾게 되는데, 어느 날 아마존에서 수상한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해리 포터> 라틴어판!

독자가 있으니 책 또한 있을 터인데 도대체 이 책을 누가, 왜 읽을까? 해리 포터의 마법이 죄다 라틴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라틴어는 바티칸이 아니라면 사용할 사람도 거의 없을 사어(死語), 즉 죽은 말이 아닌가.

좀 더 찾아보니 <라틴어 낱말 퍼즐>, <라틴어판 어린 왕자> 외에 유럽에서 큰 인기를 얻은 프랑스의 국민 만화 <아스테릭스> 라틴어판도 적잖이 판매되고 있다.

유럽어족의 어머니


라틴어는 유럽에서 쓰이고 있는 거의 모든 말들의 어머니뻘에 해당한다. 원래는 인도유럽어족의 이탈리아어파에 속하는 언어로 이탈리아 반도 중부의 라티움 지방에서 라틴 인들이 쓰던 언어였는데, 로마 제국의 공용어가 됨으로써 널리 퍼졌다.

현재의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루마니아어가 라틴어 계열에 속하고 독일어, 네덜란드어, 영어도 상당 부분 라틴어의 영향을 받았다. 한편으로 라틴어는 유럽의 근세에 이르기까지 학문의 언어로서도 큰 지위를 누렸다.

어느 학문에서든 깊이 있는 공부를 위해서는 라틴어를 피할 수 없다. 이것은 신학, 역사학, 문학뿐 아니라 철학, 법학, 정치학, 생물학, 화학, 의학 같은 분야도 마찬가지다. 비록 오늘날 ‘입말’로서의 기능은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라틴어는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있다.

식물이나 별자리의 학명에는 라틴어가 사용되는데, 좀 더 쉬운 예를 통해 라틴어의 흔적을 더듬어 보자.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유명한 문구라면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명대사 ‘카르페 디엠’(carpe diem, 오늘을 잡아라, 현재를 즐겨라)이 아닐까.

카이사르가 전쟁에서 이기고 외쳤다는 ‘베니 비디 비키’(veni, vidi, vici,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나 서울대 마크에 새겨진 ‘베리타스 룩스 메아’(veritas lux mea, 진리는 나의 빛)도 라틴어다.

펜티엄의 어원은?


그 밖에 라틴어 숫자 ‘5’를 의미하는 펜트(pent)에서 온 ‘펜티엄’, 라노스·라세티·매그너스·에쿠스·스텔라·스타렉스(영어 star에 왕을 의미하는 라틴어 rex의 합성어) 등의 자동차 브랜드, ‘기타 등등’의 의미로 쓰는 etc.(et cetera) 따위도 라틴어다.

고작 단어 몇 개로 ‘라틴어가 살아 있느니’ 운운은 지나치다고? 전혀 라틴어 같지 않은 단어를 예로 하나만 더 살펴보자. ‘미사일’(missil)과 ‘메시지’(message), 이 두 단어는 무슨 관계일까. ‘missile’의 어원은 라틴어 동사 ‘mittere’로 ‘보내다, 내보내다’의 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단어는 ‘미션’(mission), ‘메신저’(messenger), ‘missa’(가톨릭의 미사) 등과도 이어진다. 감이 올 듯 말 듯하지 않은가. 이처럼 영어 단어의 절반 이상이 라틴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유럽의 중등교육에는 라틴어가 정식 커리큘럼에 들어 있다. 그리고 고등교육에서는 라틴어는 일종의 상식에 속해서 일부 학부에서는 라틴어를 모르면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조차 없다고 한다. 유럽 문화의 원류가 그리스 로마 문화라고 한다면 그 한가운데에 라틴어가 있는 것이다. 그건 유럽의 이야기고 라틴어를 배워 어디에 쓰겠느냐고 반문한다면, 한자를 빼 버리고 우리의 역사나 문화 공부가 가당키나 한 것인지 따져 볼 일이다.

그렇게 나의 라틴어 사랑은 시작되었는데…, 외울 게 많아 곧바로 식었다. 하지만 사랑은 못 느껴도 사람을 볼 수는 있는 법. 라틴어에 관심이 있다면 <라틴어 첫걸음>(성염, 경세원)과 라틴어 공부의 명저 <휠록 라틴어 문법>(프레드릭 휠록, 비블리카 아카데미아)이 만만한 편이다. 후자는 비블리카(www.biblica.net) 라틴어 동영상 강좌의 교재로도 쓰이고 있다.

남의 말에 관한 책 한 권 소개했으니 우리말에 관한 책 한 권을 덧붙임으로써 형평을 맞추겠다. 책의 가치를 따지건대 <우리말 풀이사전>(박남일, 서해문집)이라면 무엇에든 견줄 만하다.

이 책에는 아름답고 재치가 넘치는, 그러나 안타깝게도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는 우리 토박이말이 1천710개나 실려 있다. 저자는, 폐수로 오염된 강물에 맑은 물 한 바가지를 퍼붓는다는 심정으로 썼다니 오죽하랴.

한자와 라틴어의 공통점

‘우리말을 살리자’는 책들은 많아도 이 책처럼 ‘어떻게’까지 제대로 답해 주는 책은 드물다.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예쁜 우리말 낱말들, 그중 딱 하나만 끄집어내 보자.

엘레지, 수컷 개의 생식기. 슬픈 노래, 즉 비가를 엘레지(Elegy)라고 한다. 엘레지는 원래 ‘죽은 이에 대한 애도의 시’를 뜻하는 음악용어로 18세기부터 가곡이나 기악곡으로 작곡되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토박이말에서 엘레지는 개의 생식기를 뜻한다. 서양 음악용어의 엘레지와 우리말 엘레지는 소리는 똑같지만 뜻은 이처럼 극과 극이다. 음악용어 엘레지가 ‘슬픔의 시’를 상징한다면, 우리말의 엘레지는 남성의 끈질긴 정력을 상징한다. 우리 조상들이 고작 개의 생식기를 지칭하던 말을 서양 사람들이 고상한 음악용어로 만들어놓은 것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이우희 두리미디어 편집장

이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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