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교육헌장과 일제고사

[편집인 레터] 김주언l승인2009.04.02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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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 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박정희 정권 시절인 지난 1968년 선포된 ‘국민교육헌장’의 일부이다. 당시 어린 초등학생들은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달달 외워야 했다. 전문을 외우지 못하면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선생님의 감시 아래 어두워질 때까지 교실에 남아 있어야 했다. 고등학교 입시문제에도 출제될 만큼 독재정권의 ‘금과옥조’였다. 기독교 신자들이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암송하듯이 줄줄 외워야 했다.

극우파시즘의 상징, 국민교육헌장

국민교육헌장은 일본군국주의 시절인 1890년 메이지 일왕이 선포한 ‘교육칙어’를 그대로 본딴 것이었다. 국민교육헌장은 교육칙어와 용어, 논리전개의 틀이 매우 유사하다. 개인 윤리에서 출발해 사회윤리를 거쳐 국가윤리에 이르는 구조와 자율, 자유의 정신 및 개인의 권리 등 서구의 근대성을 배제했다. 국민교육헌장과 교육칙어는 한마디로 ‘극우 파시즘’의 상징이었다. 교육칙어는 일본의 패전과 함께 사라졌고, 국민교육헌장은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인 1994년에야 교과서 및 각종 공문서에서 삭제됐다.

지난달 31일 초등학교 4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이 치른 교과학습 진단평가(일제고사)를 보면서 독재정권의 ‘국민교육헌장’을 떠올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두 가지 사안 모두 획일적 교육을 요구하는 독재의 발상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국민교육헌장이 학생들을 정권에 봉사하는 우매한 국민으로 만들려 했다면, 일제고사는 학생들을 주입식 교육을 통한 획일적 인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지난번에는 일제고사 거부 교사를 해임하고 성적 조작 파문에 휩싸였다. 학부모들과 교사, 학생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일제고사를 강행했다. 이번에는 교사, 학부모, 학생들의 집단적인 반발로 수백여명이일제고사를 거부했다. 대신 체험학습을 떠났다. 등교를 거부하거나 집단적으로 오답을 표기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전국 시도교육청은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대처하겠다”고 밝혔다.

국민교육헌장에 반대했던 교수들도 박정희 정권에 의해 옥살이를 해야 했다. 1978년 국민교육헌장을 비판한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으로 전남대 교수 11명이 해직되고, 일부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교육지표선언은 “오늘날 교육의 실패는 민주주의에 뿌리박지 못한데서 온 것이며 국민교육헌장은 그러한 실패를 집약한 본보기”라며 “부국강병과 낡은 권위주의 문화에서 조상의 빛난 얼을 찾는 것은 잘못이며 민주주의에 굳건히 바탕을 주지 않은 민족중흥의 구호는 전체주의와 권력에의 순응을 조장한다”고 비판했다.

'말 잘 듣는 국민' 만드는 일제고사

10년 전에 폐지된 일제고사의 망령을 다시 불러들인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은 한마디로 학생들을 ‘시험기계’로 만들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경쟁을 부추겨 아이들을 이기심과 탐욕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 민주시민 육성은 안중에도 없다. 왜? 그래야만 통치하기 쉽기 때문이다. 자신의 말을 잘 따르는 로봇이 민주시민 보다 다스리기 쉽다. 독재자들이 모두 그랬다.

‘자율’과 ‘책임’이라는 허명 아래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자율형 사립고, 3불 폐지, 국제중학교, 영어 몰입교육 등은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처지를 더욱 위험한 경쟁의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위협적인 조처일 뿐이다. 한해 200여명의 소중한 아이들이 입시 때문에 자살한다고 한다. 사교육으로 인한 교실 붕괴와 조기 유학은 교육환경이 극한점에 다다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21조원에 달하는 사교육비는 국가 경제를 좀 먹는 마약과도 같다. 그런데도 이명박 정부는 0교시 자율학습을 부활시키고 영어를 공교육화하며, 방과후 학습과 우열반 편성 등으로 경쟁을 노골화시킨다. 우리의 교육제도는 유엔이 정한 ‘어린이 청소년 인권 규약’ 기준으로 볼 때 집단적, 제도적 인권 유린에 해당한다.

교육학계, 시민사회단체, 문화예술인, 청소년 등 사회 각계각층 인사들은 지난 2월 12일 ‘경쟁에서 협동으로, 차별에서 지원으로’의 교육정책 전환을 요구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기하는‘2009 교육선언’을 발표했다. 2009 교육선언은 “미래를 향해 가는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낡은 과거의 틀 속에 가두려 하는 교육정책과 교육현실을 뛰어넘기 위한 새로운 성찰과 모색을 시작한다”며 “미움과 질시와 탐욕이 아닌 사랑과 나눔과 배려를 가르치는 교육, 경쟁을 넘어서 협력의 소중함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 교육으로 전환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박정희 정권이 ‘교육지표’ 선언에 참여한 대학교수들을 해직시키고 구속한 것처럼 이명박 정부도 ‘법 질서 준수’를 내세워 이들을 사법처리할 것인가. 아니면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이들의 목소리를 경청할 것인가. ‘쇠 귀에 경 읽기’라는 속담이 진실이 아니길 기대한다.


김주언 편집인

김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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