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맞이한 책

책으로 보는 눈 [81] 최종규l승인2009.04.06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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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저녁, 일산에서 인천으로 전철을 타고 오는 길에 서울 종로3가와 광화문에 들러 볼일을 본 다음, 연세대 건너편에 있는 헌책방에 책 나들이를 하러 갔습니다. 글로는 한 줄로 적는 움직임이지만 여러 시간에 걸쳐 바삐 보낸 한나절을 돌이켜보면 꽤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루나 이틀, 또는 한 달이나 한 해쯤 지난 다음 돌이키면 너무도 오랜 일처럼 떠올려지거나 부질없는 일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까마득히 잊혀지는 하루하루로 여겨지곤 합니다.

어제 들른 헌책방에서 책값을 셈하기 앞서 한 번 더 골마루를 둘러보다가 <말괄량이 삐삐>(종로서적, 1982)를 만났습니다. 이제는 사라진 ‘종로서적’에서 낸 어린이책으로 <말괄량이 삐삐>는 그무렵 책으로뿐 아니라 연속극으로도 몹시 사랑받던 작품입니다. 이 사랑은 오늘날에도 그치지 않습니다. 헌책방에서 만난 책은 제가 국민학생 때 보았던 책이고, 그무렵 텔레비전으로 보던 연속극을 환히 떠올려 줍니다. 이 책은 새로운 옮김판에다가 말끔한 판짜임으로 다시 나왔는데, 저로서는 빳빳하고 반들거리는 새책에는 그리 손이 안 가 되읽지 않고 책꽂이에 모셔 놓기만 했는데, 어릴 적 보던 책을 헌책방에서 만나게 되니, 책방에서 집으로 오는 길까지 내내 손에서 이 책을 뗄 수 없습니다.

집에 닿아 무거운 짐가방을 내려놓고 허리를 펴면서 생각합니다. 삐삐는 ‘1982년판 종로서적 책’으로만 읽어야 제맛이 아니다. 1996년판 '시공주니어 책’로 읽어도 제맛이 난다고. 그러나 책꽂이에서 찾아내어 들추는 1996년판 새 옮김책에 실린 그림은 제 눈에 낯선 그림이고, 새 옮김책 이야기는 글자가 어지러이 춤을 추며 제 눈에 와닿지 않습니다. 제가 낡은 사람인 터라 낡은 책에 익숙한지 모르나 삐삐라는 아이는 어릴 적부터 이웃집 동무처럼 느끼던 아이였고 처음 삐삐를 만난 뒤로 스무 해가 훨씬 지났어도 똑같은 어린 동무로 느끼는데, 요새 판 삐삐에서는 그 느낌을 살릴 수 없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습니다.

지난달에 장만해서 읽고 옆지기와 처제한테도 읽힌 만화책 <퐁퐁>(대원씨아이, 2008∼2009)을 바라봅니다. 오늘 저녁이면 다 읽고 덮을 <티베트 승려가 된 히피 의사>(호미,2009)를 건너다봅니다. 요 보름 동안 제 마음을 크게 움직이는 작은 책 <영원한 것을>(성바오로출판사,1964)과 <만리무영>(성바오로출판사, 1971)을 들여다봅니다.

마음에 와 박히는 책과 살짝 스쳐 가는 책이란 세월을 이겨낸다는 느낌이, 아니 세월과 함께 고이 흐르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2009년에도 싱싱하게 살아숨쉬는 1964년 번역이 있고, 2009년 이맘때에만 살아 있는 듯 느껴지는 번역이 있으며, 2054년에도 기쁘게 거듭 읽을 번역이 있습니다. ‘종로서적’도 '종로서적에서 낸 1982년판 책’도 모두 사라진 오늘날이지만, 그무렵 책 하나 만들고 간수하고 다루던 사람들은 그때부터 비롯하여 먼먼 뒷날까지도 사랑할 책을 꿈꾸고, 스러지지 않고 밝게 타오르는 촛불 같은 책을 바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언제나 새로 맞이해도 기쁘고 반갑고 따뜻한 봄날과 같은 책을 꿈꾸고, 이 책을 움켜쥔 우리들한테 앞으로도 고이 빛날 책을 만들라고 구슬 하나 남기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최종규 1인 잡지 <우리 말과 헌책방> 내는 사람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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