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먼지 뒤집어 쓰고/목련이 핀다/안질이 두렵지 않은지/기관지염이 두렵지 않은지/목련이 피어서 봄이 왔다/어디엔가 늘 대신 매맞아 아픈이가 있다/목련에게 미안하다.’(복효근 시 ‘목련에게 미안하다’)
저 꽃들을 누가 불러 왔을까를 생각 했습니다. 시인 복효근은 목련이 데려왔다고 했습니다.
남녘으로부터 들려온 꽃소식이 만개하여 여의도에, 남산에 벚꽃축제로 봄의 절정을 맞는 들뜬 시간엔 이미 그 이전에 긴 겨울을 건너온 순백의 목련 한 송이가 피었다가 진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내가 사는 골목에서 늘 봄의 시작은 목련이었습니다
목련 꽃 송이가 꽃몽오리로부터 살짝 고개를 내밀 때쯤엔 곧장 황사가 찾아들었고, 사람들은 두터운 외투를 여전히 걸치고 황사 마스크를 쓰고 다녔습니다. 정작 봄의 시작을 알리려 추위가 가시지 않는 낮과 밤을 털어 꽃을 피웠지만, 세상은 목련의 존재를 봄으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여의도 윤중로에 꽃구경 인파가 100만쯤 모였다는 뉴스를 귓전에 흘리면서 목련꽃 이파리 하나 길바닥으로 떨어지는 날, 나는 서민대책 없는 재개발 반대의 횃불이 타오르던 용산 4구역의 새벽을 떠올리며 가재울로 향했습니다
가재울 에는 꽃이 없다
서울시 서대문구 북가좌동 144번지. 35층짜리 아파트가 3천여채 건립이 된다는 가재울 뉴타운 공사 현장은 황량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작동을 멈춘 포크레인이 봄날과는 사뭇 다른 을씨년스런 모습으로 서 있었고 오고가는 사람들도 거의 없는 죽은 땅 같았습니다. 다만 15만6천 제곱미터가 넘는 너른 땅은 그 안에 살았던 뭇 생명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무장해제 당한 전장의 병사처럼 넋을 잃었습니다. 터무니없는 이주 보상비를 거부한 남은 주거세입자는 2가구, 상가 세입자 100여 가구만 대책위 사무실을 지키며 싸우고 있었습니다.
세입자 대책위 사무실 앞에서 만난 50대 중반의 이 씨 아저씨는 평평하게 터 닦인 공사현장을 보며 내 생전 이렇게 넓은 마당을 가져보리라곤 생각도 못했다고 쓸쓸하게 웃었습니다. 그는 만약 용산에서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가재울에서 라도 일어났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지난 2년간의 철거 반대 싸움이 녹록치 않았음은 그의 절박한 한마디의 말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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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터를 잡고 가게를 열며 들여놓았던 냉장고며 에어컨 같은 기계설비만 1천여만원이 들었는데 철거가 되면서 고물상에 처분된 가격은 20만원 밖에 안되었다는 말 속에는 1억원을 투자 했지만 고작 2천만원을 보상으로 받아야 하는 수많은 상가 세입자들의 고통이 녹아있습니다. 4월 가뭄이 한창이던 그날, 혹여 철거된 집터 어디에서라도 누군가가 남기고간 화분의 꽃씨가 싹을 틔우지 않았을까 싶어 공사현장 곳곳을 돌아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그 흔한 민들레 꽃 하나 피어있지 않았습니다. 온 나라가 봄꽃 소식으로 치장되어 있는 시간, 꽃 한송이 키우지 못하는 땅위에서 나는 저무는 해를 오래토록 바라보았습니다.
“여기 사람이 있다”
저녁 햇살이 사천교 다리 위를 지나가다 잠시 머물며 개나리꽃 위에 앉은 비둘기 한 쌍을 비춥니다. 애초 다리는 소통의 길 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속도의 길이 되었고, 놀랄만큼 빠르게 지나가는 자본의 속도에 소외된 많은 이들은 다시 다리로 모여 소통을 외칩니다.
강북과 강남을 잇는 거대한 다리들은 소통이 사라진 세상에 항거하는 사람들의 최후 선택지가 된지 오래입니다. 평화의 상징이었던 비둘기가 공사장 철사줄에 다리가 끊겨 절뚝대는 사천교 다리 위를 지나며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내 삶의 지향점을 다시 확인 합니다.
버스가 안국역에서 멈추고 나는 문 닫을 시간을 넘겨버린 ‘space-peace’의 ‘亡淚戰’(망루전) 전시회장으로 바쁜 걸음을 옮깁니다. 용산참사를 기억하며 함께하는 문화 예술인들의 현장 작품이 전시 되어 있는 그곳에는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치던 망루위의 절규를 산산 조각 내어 버린 국가공권력의 만행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존경은 간사한 혓바닥에 있지 않고 심장에 눈빛에 있다. 당신이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을 외쳐댈수록 불행히도 나는 자꾸만 사기당한 기분이 든다”는 손 세실리아의 시가 입구부터 마음을 숙연하게 만듭니다. 망루(望樓)는 방어의 장소입니다. 감시하고 조망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용산 4구역의 철거민들이 올라간 망루는 더 이상 지킬 것도 감시하고 바라볼 것도 없는 사람들의 최후의 선택지였습니다. 그것도 도곡동 타워팰리스의 맨 꼭대기 층 2채를 터서 한 집으로 쓰는 사람들의 전망 좋은 망루도 아니고, 청와대 뒷산에 올라 촛불의 개수를 세는 대통령의 망루도 아니고, 그저 5층짜리 낮고 소박한 건물의 옥상이었습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을 외쳐대는 사람들이 멀찍이 높은데서 국민들을 감시하고 있는 사이 낮고 천한 백성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그들의 망루(亡淚)에서 “여기에 사람이 있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불꽃이 되었습니다. 용산 참사로 희생된 5분의 초상이 아리게 가슴에 박힙니다. 못난 정부 없는 곳에서. 강제 철거 없는 곳에서 살고 싶어 못난 조국을 등진 이들의 눈빛이 가재울에서 만났던 이 씨 아저씨의 눈빛과 많이 닮아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다시는 어떤 초상도 그리지 말이야 한다는 작가들의 결의가 그 전시회 공간에 가득 했지만 나는 또다시 그초상 앞에 놓인 시든 국화꽃이 서러워 가슴이 무너져 내립니다.
대통령이 드셨다는 순대국밥
낙원상가엘 갔습니다. 세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악기점들의 집합소인 그곳 아래에는 지난 대선 때 대통령이 후보시절 광고를 찍은 순대국밥 집이 있습니다. 저녁 때가 되어 자리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북적대는 식당 한 구석에서 3천500원 짜리 국밥을 앞에 놓고 대통령께서 이 국밥을 정말로 맛있게 드셨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다음날 새벽2시까지 호프집을 운영했던 용산의 고 이상림 노인의 가족은 아직도 장례를 치르지도 못하고 있는데, 열심히 일하면 누구나 국민성공시대를 열겠다던 광고의 다짐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입니다. 이명박은 배고프다는 광고의 문구가 낮은 곳에 있는 주춧돌을 빼내어 고층 아파트의 옥상위에 올려놓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해놓은 것이 없는 지금, 처음 먹어보는 3천500백원 짜리 서민음식 순대국밥 한 수저로 서민들의 요구를 다 이해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워서입니다. 순대와 돼지머리를 담아놓은 양푼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릅니다. 생의 고단함을 노동으로 일구어 내는 사람들의 어깨위에 피어나는 희망이 자칫 저 양푼위의 김처럼 흔적 없이 사라질까봐 두려웠습니다.
어둑해진 골목을 빠져나오면 가재울에서 만난 이 씨의 넋두리도, 용산희생자의 마지막 외침도 이내 바삐 움직이는 자동차의 바퀴 속으로 맴돌며 빨려 들어갑니다
‘노래를 부른다/허리가 굽은 그가 탁자를 타닥 치며/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희망가를 부른다/이마의 깊은 주름은 세상을 덮고/눈길 머무는 나를 본다/그렇다/저 노인은 가는 길을 안다/끝내 흙으로 돌아가는 길을/안다.’(최산 시, 장사익 노래 ‘국밥집에서’)
이지상 가수·성공회대 외래교수
이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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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가 날자 배 떨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