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칼 맑스(2)

철학여행까페[67]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9.04.14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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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결국 칼 맑스는 철학을 선택했다. 그는 박사 클럽을 통해 헤겔철학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베를린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공부를 폭넓게 설명하면서 전공을 법학에서 철학으로 바꾼 이유를 납득시키려 한다.

그는 칸트 이래의 독일철학에서 자기를 가장 괴롭힌 문제가 존재(Sein)와 당위(Sollen), 즉 현실과 이상간의 대립이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제 헤겔철학을 알게 되면서부터 현실그 자체 속에서 이념을 파악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마침내 장막이 걷혔으며, 저의 지성소는 갈가리 찢겨 나갔으며, 새로운 신이 그것을 대치했습니다. 저는 문득 칸트철학과 피히테 철학을 비교해 강화한 관념론, 즉 헤겔철학을 통해 현실 자체 안에서 이념을 탐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지금까지 신들이 지상보다 높은 곳에 살았다고 한다면, 이제 그들은 지상의 중심이 되었습니다.”(1837년 11월 10일 편지)

이동희
청년 맑스
헤겔철학에 매력을 느끼다


청년 맑스는 확실히 헤겔의 철학에 매력을 느꼈다. 헤겔의 철학이 칸트 철학이 남겨 놓은 이분법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헤겔 철학 속에는 여전히 이론적 내적 모순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1841년에 맑스는 학위 논문 제출에 대해 까다로운 베를린 대학을 피해 예나 대학에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했다. 예나 대학은 맑스 본인이 참석하지 않은 부재 중에 그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한다. 박사학위논문은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였다. 그는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포이어바하, 브루노 바우어처럼 헤겔 좌파의 철학자들이 프러시아의 보수적인 정권에 부딪쳐 거의 모두 교수 자리를 얻는 것에 실패하는 것을 보고 교수직을 포기한다.

교수직을 포기한 대신 그는 민주주의적 자유를 위해 정치적 투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그는 프러시아의 검열에 대한 글을 썼다. 그리고 프러시아의 정치체제를 공격하기로 한다. 그는 1842년 초에 아르놀트 루게의 원고 청탁을 받고 헤겔의 <법철학>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쓴다. 그는 헤겔의 <법철학>이 프러시아의 입헌 군주정을 옹호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대한 비판을 중요한 과업으로 여겼다.

그가 볼 때 입헌 군주정은 “내적 모순에 가득 차 있는 혼혈 잡종이며, 틀림없이 자멸할” 정치 체제였다. 그는 헤겔의 법철학에 대해 집중적으로 비판을 가하면서 중요한 구절마다 주석을 가했다. 그러나 이 작업은 그가 쾰른에서 발행되는 ‘라인신문’의 편집 일을 맡으면서 미루어진다. 이 신문은 자유주의적 경향을 가진 신문으로 정치적 탄압을 받고 폐간의 길을 걷게 된다. 프로이센 왕이 이 신문을 “라인강의 창녀”라고 부르고 폐간시켜 버렸기 때문이었다.

폐간 후 맑스는 1843년에 오랫동안 기다려 온 약혼녀 예니와 크로이츠나흐 바울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맑스는 결혼 후 크로이츠나흐라는 소도시에 칩거하면서 헤겔의 법철학에 대한 치밀한 비판적 작업을 행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헤겔 법철학 비판>이라는 원고를 완성했다. 이것은 헤겔 법철학의 261절에서 313절에 대한 주석과 비판적 논평이었다. 초고로 볼 때 그는 이 원고를 출판할 의도로 쓴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다만 헤겔 법철학을 읽으면서 비판적인 노트를 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헤겔의 법철학에 맑스의 비판은 그 사이에 출간된 포이어바하의 <철학의 개혁을 위한 잠정적 명제들>에 대한 영향이 크다. 헤겔은 포이에르바하가 “자연에 너무 치중해 정치를 경시했다”는 점을 빼고는 그의 방법을 수용했고, 그것을정치적인 측면에서 헤겔철학의 비판에 응용하였다.

이 해에 맑스는 예니와 함께 파리로 갔다. 거기서 그는 아르놀트 루게와 함께 ‘독불연감’을 발간한다. 그러나 잡지에 대한 호평에도 불구하고 독불연감은 1집을 끝으로 단명하고 만다. 루게와 맑스의 정치적 입장 차이 때문이었다. 루게는 노동자 계급에 동조하지도 않았고, 맑스의 공산주의적 입장에 동조하지 않았다.

이동희
시인 하이네
시인 하이네와의 친교


루게와 결별한 후 맑스는 프랑스에 망명 중인 여러 혁명가와 사회 운동가들을 만나 교유한다. 그중에서도 맑스가 절친하게 지낸 사람으로는 시인 하이네를 들 수 있다.

하이네는 우리에게 낭만적 서정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잘 알려져 있는 하이네의 낭만적 시를 하나 인용해 보자.

‘아름다운 5월에/꽃봉오리들이 모두 피어났을 때/나의 마음 속에도/사랑의 꽃이 피어났네
아름다운 5월에/새들이 모두 노래할 때/나도 그 사람에게 고백했네/그리운 마음과 소원을…’

슈만은 시인의 사랑을 통해 그의 서정적 시를 가곡으로 만들어 널리 알렸다. 그래서 하이네는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하이네가 정치적 혁명적 시인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이네 역시 맑스처럼 독일에서의 탄압을 피해 프랑스로 정치적 망명을 와 있었다. 하이네는 독일 민중의 처참한 생활상을 시로 고발하였다. 그가 쓴 정치시인 ‘슐레지엔의 직조공들’을 읽어 보면 서정시인으로서의 하이네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민중의 처참한 삶과 고통에 대해 증언하는 시대의 증인으로서의 그의 모습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침침한 눈에 눈물도 말랐다/그들은 베틀에 앉아 이를 간다/독일이여, 우리는 너의 수의를 짠다/우리는 그 속에 세 겹의 저주를 짜 넣는다/우리는 덜거덕거리며 옷감을 짠다/우리는 덜거덕거리며 옷감을 짠다!

첫 번째 저주는 하느님에게/우리는 추운 겨울에도 굶주리면서 그에게 기도하였건만/우리는 헛되이 기구하고 기다려 왔다/그는 우리를 원숭이처럼 놀리고, 조롱하고 바보로 만들었다/우리는 덜거덕거리며 옷감을 짠다/우리는 덜거덕거리며 옷감을 짠다!

두 번째 저주는 임금님에게, 부자들을 위한 임금님에게/우리의 비참한 삶을 본 체도 않고/그는 우리의 마지막 몇 푼까지 착취해 간다/그러고는 우리를 개새끼처럼 쏴죽이라 한다/우리는 덜거덕거리며 옷감을 짠다/우리는 덜거덕거리며 옷감을 짠다!

세 번째 저주는 그릇된 조국에게/이 나라에는 오욕과 수치만이 판을 치고/꽃이란 꽃은 피기도 전에 꺾이며/모든 것이 썩어 문드러져 구더기만 득시글거린다/우리는 덜거덕거리며 옷감을 짠다/우리는 덜거덕거리며 옷감을 짠다!

북(紡錘)은 나는 듯이 움직이고, 베틀은 삐거덕거리며/우리는 밤낮으로 부지런히 옷감을 짠다/늙어빠진 독일이여, 우리는 너의 수의를 짠다/우리는 그 속에 세 겹의 저주를 짜 넣는다/우리는 덜거덕거리며 옷감을 짠다/우리는 덜거덕거리며 옷감을 짠다!’(시 ‘슐레지엔의 직조공들’)

이동희
케테 콜비츠 작 직조공들의 행진
1844년 6월 독일 슐레지엔 지역의 직조공들이 견딜 수 없는 착취와 극심한 저임금에 항거해 봉기하였다. 하이네는 이 봉기를 민중들의 편에 서서 노래하였다.

맑스는 이런 하이네를 가장 가까운 친구로 사귀었다. 하이네는 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독일관념론에 대한 책을 쓸 정도로 가장 박식한 사람이었다. 맑스는 하이네와 친교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맑스는 파리를 떠나면서 하이네에게 이런 글을 쓰기도 했다.

“하이네, 내가 이곳에 남겨두고 가야 하는 것들 중에서 당신과 헤어지는 것만큼 고통스런 것은 없을 것이오. 당신이 나와 함께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이네는 죽는 날까지 맑스를 과학자로서, 혁명가로서 깊이 존경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차이도 있었다. 맑스는 역사의 종말론적인 입장에서 공산주의라는 약속된 승리를 확약하고 투쟁을 독려했다면, 하이네는 승리에 대한 비전이나 약속 없이도 그것이 불의하기 때문에 그러한 불의에 맞선 끝없는 투쟁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약속된 승리 없이도 싸워야만 하기 때문에 싸워야 하는!

철학에서 경제로 관심사 이동

맑스는 파리에서 철학의 관심에서 경제학적인 관심으로 옮겨 간다. 그는 <경제학·철학 초고>를 작성한다. 이것은 1844년 4월부터 8월까지 씌어졌다. 이 책은 청년 맑스의 휴머니즘적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저작이다. 이 저작의 중요한 개념은 소외된 노동이다.

맑스는 프로이센의 정부의 압력으로 파리에서도 추방당해 브뤼셀에 잠시 머문다. 그는 브뤼셀에서 제1차 세계 공산당(회원 17명)을 창당한다. 벨기에 당국은 혁명적 망명가인 맑스에게 망명처를 제공하는 것을 꺼렸고, 골칫거리로 여겼다.

1845년 3월 22일 맑스는 경찰당국에 소환돼 벨기에서는 현실 정치에 관한 저서를 일체 출판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해야 했다. 이 모든 압력의 배후에는 프러시아 당국이 있었다. 그해 12월 맑스는 프러시아 당국의 간섭을 더 이상 받지 않기 위해 프러시아 시민권을 포기했다.

벨기에 머물면서 맑스는 파리에서부터 쓰기 시작한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를 쓴다. 1845년에 그는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를 통해 포이어바하를 비판하고 자기 철학의 입장을 좀더 분명하게 밝힌다.

“철학자들은 단지 여러 가지로 세계를 '해석'해왔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일이다.”

<다음 호에 계속>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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