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은 형사재판에서 ‘유죄’의 반대말은 ‘무죄’가 아니라 ‘유죄의 증거가 없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실제 무죄를 선고한 형사 판결문을 자세히 보면, 주문(판결의 결론)에는 ‘무죄’라고만 씌어 있으나, ‘이유’에는 ‘이러이러한 증거는 믿기 어렵거나 공소사실을 인정하기에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 따라서 위 공소사실은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므로 무죄를 선고한다’라고 씌어 있다.
말장난 같기도 한 이 말의 속뜻에는 증거재판주의나 무죄추정원칙 등 형사재판의 여러 가지 대원칙이 숨어있지만, 그만큼 형사재판에서는 증거가 중요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형사재판절차에서 증거는 공소사실을 입증할 책임이 있는 검사 뿐만 아니라 피고인에게도 필요하다. 피고인은 자신이 공소사실에 쓰인 대로의 형사책임이 없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서 증거가 필요하다. 2008년 1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개정 형사소송법은 피고인 쪽의 증거 수집과 관련하여 의미심장한 규정을 새로 마련하였다.
개정법은 검사가 신청할 예정인 증거 외에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까지를 포함한 ‘전면적 증거 개시’를 원칙으로 규정하였다. 이로써 검사가 법원에 증거로 제출하지 않은 관계 서류를 열람하고 등사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종전의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검사가 피고인에게 유리할 가능성이 있거나, 법률상, 사실상 주장과 관련된 서류나 물건을 가지고 있다면 피고인 또는 변호인은 그 서류와 물건의 열람, 등사 뿐만 아니라 교부까지 신청할 수 있다. 만약 검사가 이를 거부할 때에는 피고인 쪽은 검사의 열람, 등사 허용 거부가 부당함을 주장하면서 법원에 열람, 등사, 교부 허용신청을 할 수 있고, 법원의 열람, 등사, 교부 허용결정이 있을 경우 검사에게서 서류와 물건의 열람, 등사, 교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피고인 쪽은 이렇게 개시된 서류를 살핀 다음 필요할 경우 자신에게 유리한 증거로 제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전면적 증거개시제도를 도입한 우리 형사소송법은 얼마나 잘 지켜지고 있을까?용산참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형사재판절차를 보자. 지난 4월 16일 검찰은 ‘철거민 진압작전을 결정하고 지시한 경찰지휘관들의 진술조서들을 비롯하여 피고인들의 주장과 관련된 서류들을 변호인들에게 열람하게 하고 등사하게 하라’는 내용의 법원의 증거개시결정(열람등사 허용결정)을 무시하고 또다시 서류 열람, 등사를 거부하였다.
개정 형사소송법은 법원이 심리를 거쳐 열람, 등사 허용결정을 내리면 검사는 더 이상 법원의 결정을 다툴 수 없고, 결정을 그대로 따라야 함에도 말이다. 더구나 검찰이 개시를 거부한 수사서류들은 경찰의 진압작전 결정과 집행이 적법하게 이루어졌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것들인데도 경찰 수뇌부의 ‘명예나 사생활의 비밀, 생명과 신체의 안전, 생활의 평온을 현저히 해할 우려가 있다’는 등의 이유로 법원의 결정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 검찰이 법원의 결정을 따르지 않고, 검찰 스스로 형사소송법의 규정을 지키지 않는다면, 개정 형사소송법이 도입한 증거개시제도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다.
차혜령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변호사
차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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