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에게 불을 주려 한 프로메테우스-칼맑스(3)

철학여행까페[68]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9.04.27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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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는 브뤼셀로 와서 엥겔스를 다시 만났다. 엥겔스와 함께 공동으로 <독일 이데올로기>를 집필하였다. 이 책은 엥겔스와 공저로 되어 있으나, 사실상 맑스의 사상으로 가득 차있다.

맑스는 이 책에서 청년헤겔주의자와 결별을 선언하고, 인간사회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인식방법인 유물사관에 대해 최초로 체계적으로 서술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자체 내에 잉태하고 있다고 썼다.

엥겔스를 만나다

맑스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독일 이데올로기>를 함께 썼던 엥겔스였다. 엥겔스는 맑스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이론적 동지이자 후원자로 평생을 살았다.

이동희
동베를린에 있는 맑스와 엥겔스 동상

엥겔스는 아버지가 공장주인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맑스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1842년 제대 후 아버지가 관계하던 공장에 입사하기 위하여 맨체스터로 가던 도중 쾰른의 <라인 신문>편집소에서였다.

엥겔스는 아버지의 사업을 위해 영국에 체재했다. 그러나 그는 사업 보다 자본주의 분석연구에 훨씬 더 관심을 가졌다. 1844년 맑스와 A.루게가 발간하는 <독일-프랑스 연보>에 〈국민경제학비판개요를 기고하였다.

맑스는 과학적 사회주의에 대한 초기 해석과 자유주의 경제이론의 모순점을 제시한 엥겔스를 높게 평가했다. 같은 해에 파리에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나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은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기초를 확립함과 동시에 1846년 초에 공산주의 통신위원회를 창립해 혁명적 공산주의자와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당의 교육을 위한 지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맑스는 1847년에 공산주의의 동맹이 결성되자 엥겔스와 함께 공산주의 동맹에 가입하였다. 그는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의인동맹(義人同盟)이라는 단체에 가입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행동주의적, 급진적, 혁명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던 이 비밀결사단체를 공개조직인 공산주의자 연맹으로 전환시키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쓴 것이 <공산당 선언>이다. 동맹의 강령인 <공산당 선언>은 1848년 2월에 발표되었다. <공산당 선언>의 본문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제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그러나 맑스와 엥겔스는 1850년에 이 연맹에서 추방된다. 그들이 정관에 반대해서 본부를 쾰른에 두려 하자 나머지 회원들이 그들을 “어설픈 학자들의 정치적 몽상”이라고 비난했다.

<공산당 선언>이 발표된 시기인 1848년 2월에 파리에서 혁명이 시작되었다. 혁명영향은 벨기에,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유럽 전역에 전파되었다.

공산당 선언의 출간

맑스는 브뤼셀에서 혁명이 시작되어 체포되어 추방되었다. 그러나 맑스는 파리, 쾰른 등지로 가서 혁명에 참가하였다.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고, 각국에서 맑스에게 추방령을 내리자 결국 맑스는 런던으로 망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1848년에서 1850년까지의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을 1850년에,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1852년에 차례로 발표했다. 이 저서들은 맑스가 유럽에서 일어난 혁명을 체험하고 쓴 것들이었다.

이 두 작품은 유물사관으로 역사적 사건을 분석한 최초의 시도로 평가된다.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상호관계, 국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태도 문제를 밝히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국가형태론을 발전시켰다.

이동희
맑스 가족과 엥겔스

맑스는 1852년부터 런던에서 뉴욕 트리뷴지의 유럽 통신원으로 일했다. 그러나 맑스의 런던 생활은 정신적 고통과 물질적인 빈곤의 연속이었다. 맑스는 대개 후원금으로 살아갔는데, 특히 맨체스터에서 아버지의 방적공장에 근무하고 있던 엥겔스의 재정적 원조로 생계를 유지했다.

맑스는 경제이론에는 대가였지만 집안 경제에는 거의 무능력했다. 집안 살림은 예니가 꾸려갔다. 그러나 수입이 없는 이상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가구를 저당 잡히기도 했다. 맑스가 외출을 할 수 없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까닭은 옷을 저당 잡혔기 때문이었다.

맑스는 빚으로 압박을 받아 파산 선고를 하려다 엥겔스가 막아 준 적도 있었다. 예니는 비참한 생활에 절망하곤 했다. 맑스와의 사이에서 태어 난 아이들이 죽기도 했다. 그 사이에 맑스는 예니와 그녀의 하녀 사이와 연애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녀 사이에 태어난 자식의 이름은 프레데릭이었다. 엥겔스가 아이의 아버지를 자처했다.

맑스는 재정적 궁핍과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 경제학 연구에 몰두했다. 맑스는 날마다 대영박물관으로 출근하다시피해서 1859년 경제학 이론에 대한 최초의 저서 <경제학비판>을 간행했다.

맑스는 1862년 자본주의를 분석한 총체적인 저서를 구상했다. 이 책은 1867년 <자본론>이라는 이름으로 1876년에 함부르크에서 출판하였다. 그러나 제1권만 출판되었다. 제2권과 제3권은 맑스의 사후에 엥겔스가 1885년과 1894년에 각각 출판하였다.

이동희
프로메테우스
그리고 처음에 제4권으로 구상되었던 부분은 K.카우츠키에 의하여 1905∼1910년에 <잉여가치학설사>라는 이름의 독립된 형태로 출판되었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잉여가치법칙이 자본주의의 운동법칙이며 자본주의적 생산의 절대적 법칙이라는 것을 밝혔다.

맑스는 <자본론>을 위한 연구를 하면서도 실천적인 활동에 계속 참여하였다. 1864년 제1인터내셔널이 창설되자 맑스는 이에 참여했다. 제1인터내셔널이 해체되고 난 후에도 맑스는 유럽과 미국의 노동운동에 관여했고, 노동운동 지도자들의 중요한 물음에 자문을 해주었다.

열정적인 삶과 혁명적 이론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맑스의 말년 삶은 불행했다. 그는 마지막 10년 동안 피부병에 시달리며 만성적인 정신적 침체에 빠져 있었다.

말년 삶은 불행했다

죽기 직전 수 년 동안은 많은 시간을 휴양지에서 보냈다. 1881년 12월에는 아내의 죽음으로, 1883년 1월에는 장녀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그는 그해 3월 14일 런던 자택에서 평생의 친구이자 협력자인 엥겔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64세로 일생을 마쳤다.

맑스의 삶은 혁명과 이론에 바쳐진 삶이었다. 맑스는 자신을 인류에게 불을 훔쳐 다 준 죄로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며 고통을 당하는 프로메테우스에 비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어떠한 불을 훔쳐다 주려 한 것일까?

<다음 호에 계속>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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