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엽전들’ 이야기

[이지상의 사람이사는마을] 이지상l승인2009.04.27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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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시’처럼 활용 빈도 많은 그 표현
외나무 다리서 마주친 염소꼴 안돼야


몇 년 전 어느 공연장 대기실에서 있었던 풍경입니다.

출연진들이 각자 리허설을 끝내고 주최 측이 마련한 도시락을 저녁으로 먹고 있었습니다. 공연전의 긴장감 때문에 나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는데 갑자기 옆방 대기실에서 큰소리가 나기 시작 했습니다.

내용인즉슨, 다른 출연자들은 도시락을 다 줬는데 왜 우리는 안 주느냐, 왜 우리를 푸대접하느냐를 따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방에는 외국에서 모셔온 대규모 예술단(A예술단이라고 해두죠)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에이 엽전들…”


주최 측은 A예술단원 전체가 한꺼번에 식사를 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 한데 도시락 배달이 늦어지니 개인 출연자에게 먼저 드린 것뿐이라고 해명하고 A예술단을 홀대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질 못했다고 정중하게 사과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술단을 인솔해온 분은 분이 덜 풀렸는지 이후 약 10여분이 넘게 큰소리로 항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뜩이나 공연 전에 먹는 도시락은 넘어가지도 않는데 그거 먼저 먹는다고 텃세 부린 꼴이 되었으니 다른 출연자들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습니다. 내 옆에서 조용히 식사를 하시던 J 선생이 한마디 하셨습니다. “에이그~ 저 엽전들 조금 기다렸다 먹으면 되지 무신 대접을 받을라고 저 지랄이여? 쯧쯧.” J 선생은 무대에서 충청도 사투리로 “아줌마~ 희망한단에 을마유우~”하시는 분인데, 느릿하고 구수한 사투리조로 “에이 엽전들…” 하니 웬 말이 그리도 정겨워 나름 심각한 상황에도 모두들 킥킥대고 “넌 떠들어라 난 밥 먹는다”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공연도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엽전들’ 이란 말은 내가 자란 동네에서는 지금도 참 많이 쓰는 용어입니다. 이 말은 전라도 사투리인 ‘거시기’처럼 사용되는 범위가 엄청나게 넓어서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 뭔가가 있는 사람 혹은 집단에 두루 적용 됩니다.

이를테면 작은 교통사고인데도 너무 가해자가 물어내기 버거운 배상금을 요구한 사람, 그저 섭섭하다 한마디 하고 웃고 넘어갈 일을 동네방네 시끄럽게 싸움 거는 사람, 조금 양보하면 될 것을 뭔 영화를 보겠다고 바득바득 우겨서 꼭 상대방을 이기고야 마는 사람, 우리 동네에서는 다 “에그 저 엽전~” 하는 비아냥을 들어야 합니다.

사람구실 못할 때 썼다

평소에는 소심하기 이를 데 없지만 술만 먹으면 마누라 패는 사람한테도, 마을사정을 X도 모르는 면서기가 와서 이래라 저래라, 왜 내말 안 듣냐 언성을 높일 때도 다 엽전 소리를 듣습니다.

그런가 하면 좀 높아 보이는 치들에게는 오금 못 펴고 살살 기는 사람들에게도 이 표현은 적용 됩니다. 주로 마을 상갓집에 국회의원 후보가 오면(실제로 국회의원이 온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일일이 악수시키면서 보좌관인양 행세하는 사람, 군수가 보낸 근조(謹弔)깃발을 '내가 얘기해서 갖고 왔소' 하는 따위의 공치사를 하는 사람 등이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엽전들'이란 말에는 <허삼관 매혈기>의 '자라 대가리'라는 욕처럼 찌질 하고 궁상맞고 못난 것들이나 <완장>에 나오는 저수지 관리인 종술이처럼 서푼짜리 벼슬을 조자룡의 헌 창 인양 휘두르는 어리석은 무리들 또는 회장님 방귀소리에 화장지 미리 갖다 바치는 그야말로 알아서 척척 기어주는 딸랑딸랑 잔챙이 나리들의 능글맞은 웃음 까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주 올드한 코미디 매니아이셨던 분들은 배추머리 김병조 선생의 유행어를 기억 하실 겁니다. “나가 놀아라아아~.”

실제로 우리 동네에서 엽전소리들은 사람은 그 버릇 고쳐질 때까지 거의 나가놀아야 합니다. 동네사람들이 별 상대를 안 해주기 때문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공동체가 지녀야할 가치를 벗어난 사람들에게 ‘엽전’이란 굴레로 경고를 함으로써 자신의 오류를 바로잡도록 하는 것입니다

요즘에 ‘나가 놀아’야 할 사람들 참 많습니다. 찰랑찰랑대는 엽전들 소리가 안 들리는 곳이 없는 것 같습니다. ‘칼리쥐 오브 블루하우스’,‘스프 구락부’에 계신 분들 얘기는 하도 지겨워서 이젠 말하기도 싫습니다.

다시 그 말 쓰긴 싫다

4월 29일엔 국회의원 재선거가 열립니다. 다른 곳은 관심을 놓은 지가 오래인데 유독 울산 북구 상황은 무척 궁금해집니다. 조승수 후보와 김창현 후보가 각각 진보의 기치를 들고 표심을 잡고 있습니다. 진보 단일화가 안 되면 당연히 스프 구락부에서 국자하나 들고 딸랑대실 분이 당선 되실 겁니다.

몇 번의 단일화 실패를 경험 했으니 최종 단일화 합의를 위한 서명을 끝냈다고 해도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믿을지 의문입니다. 그나마 단일화가 성사되는 시점은 선거 이틀 전. 그래서 더 불안 합니다 선거 끝나고 나는 그 분들께 ‘엽전들, 니들이 하는 일이 다 그렇지… XX럴~” 하는 자괴감 섞인 독백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염소새끼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듯 서로 대가리 디밀고 버티다가 결국 둘 다 개울에 빠지는 요런 부류의 인간형이 우리 동네 '엽전들'의 최고수이기 때문입니다


이지상 가수·성공회대 외래교수

이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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