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길에 책읽기

책으로 보는 눈 [84] 최종규l승인2009.04.27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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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무라 고진이라는 일본사람이 쓴 <지로 이야기> 가운데 1부부터 4부까지 두 권으로 먼저 나왔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바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귀여우니까 이렇게 내 손으로 키우고 있잖아. 당신이야말로 아이들이 귀엽지 않으니까 허구한 날 빈둥거리면서 돈 한 푼 못 벌어오는 거 아냐.”(1권 19쪽)

1936년부터 1954년까지 쓰이다 끝내 마무리를 보지 못한 <지로 이야기>를 군국주의 일본은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하는데, 군국주의 일본임에도 여느 사람들한테는 따순 마음이 남아 있었기에 <지로 이야기>는 널리 사랑받았습니다. 어쩌면 여느 사람들 마음은 언제나 따스했으나, 여느 사람을 다스리는 정부만 차갑고 매몰차고 딱딱하고 메말랐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군대를 키우는 정부가 된다면, 군대 힘에 아낌없이 돈을 대는 정부라 한다면, 경찰과 군대가 어마어마하게 힘을 내는 정부로 꾸려 간다면, 우리 스스로 따순 가슴을 잃지 않도록 <지로 이야기>를 쓰고, 또 이 책을 읽는 손길이 있을지라도 차츰차츰 길들고 물들면서 여느 사람들 마음결이 차디차게 바뀌거나 메마르게 달라질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다케나카 치하루라는 일본사람이 쓴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라는 책을 전철길에 읽습니다.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면서도 읽습니다. 버스길에서는 학교 공부를 마치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이 많이 타고 있습니다. 버스가 덜컹거리기도 하지만, 버스길에 책을 펼쳐 읽는 아이들을 못 본 지 무척 오래되었습니다. 수다를 떨고 손전화 놀이에 푹 빠질 뿐입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고등학교를 다닌 1991∼1993년에도 버스길에 참고서 아닌 여느 책을 펼쳐 읽은 또래를 본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버스길에서 책읽는 아이들을 만나기는 힘들 듯합니다. 무엇보다도 버스길에 책읽는 어른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버스길이란 흔들흔들 비틀비틀이기도 하며 자리가 많지 않아 서서 다녀야 하기도 하는데다가 한손으로 책을 쥐고 한손으로 손잡이를 잡기가 만만하지 않으니 더욱 어렵습니다. 그래도 어김없이 버스길에 책을 펼쳐드는 몇몇 어른들을 만나곤 합니다. 이분들이 어떤 책을 펼쳐드는지는 모르지만 이처럼 버스길에도 책읽는 어른들이 있기에, 책이 안 팔리고 안 읽힌다는 소리가 드높더라도 다시금 힘을 내어 모든 슬기로움을 책으로 담아내어 나누려는 책마을 품앗이가 고이 이어질 수 있다고 느낍니다.

집에서 아기를 품에 안고 소리를 내어 <지로 이야기>도 읽고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도 읽습니다. 아기가 책을 알아들을 리 없고, 알아듣는들 아직 헤아릴 리 없습니다. 아빠가 책읽는 목소리를 귀에 익숙하게 받아들여 주기를 바란다 할 텐데, 딱히 이렇게 바라는 마음은 아닙니다. 아빠한테는 책읽기가 삶이며, 아기 기저귀를 빨고 밥하고 집안일하는 모두가 삶입니다. 이 모두를 있는 그대로 아기와 함께 즐길 뿐입니다. 다 마른 기저귀를 개는데 아기가 엉금엉금 기며 다 헤집어 놓습니다. ‘하하, 그래 네 기저귀인데 다 헤집어 봐라!’ 하면서 다시 갭니다. 한참 기고 서고 놀던 아기가 가까스로 잠듭니다. 아빠와 엄마는 허리를 겨우 폅니다. 밀린 빨래도 하고 밥도 먹고 책도 읽습니다.


최종규 1인 잡지 <우리 말과 헌책방> 내는 사람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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