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애주의자 버트런트 러셀(1)

철학여행까페[70]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9.05.18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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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중 가운데 누군가가 여성의 선거권과 여성 해방을 열심히 주장하던 한 젊은 지식인에게 썩은 계란과 쥐를 던졌다.

“여성이 무슨 정치인가, 집에서 밥이나 하고 아이나 잘 키우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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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 앉아있는 러셀
보수적인 영국 사람들 특히 남성들은 여성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보다 집안일을 더 잘하는 것을 여성의 본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성의 참정권에 대한 요구는 그칠 줄 몰랐다. 이미 1869년에 J. S. 밀은 <여성의 종속>에서 여성참정권운동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 그해 의회 선거에서 여성 납세자에게도 처음으로 선거권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아직 여성의 보편적인 선거권이나 피선거권이 인정된 것은 아니었다. 영국에서는 1918년 인민대표법에 의해 30세 이상의 여성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인정되었고, 1928년에 가서야 남녀평등 보통선거가 실현되었다.

여성에 대한 편견과 무지가 지배하던 시절에 썩은 달걀과 쥐 세례를 받은 이 젊은 지식인은 러셀이었다.

J. S. 밀의 영향을 받다

러셀은 당시에 캠브리지대학교 강사였다. 1907년에 러셀은 여성의 참정권을 옹호하며 하원 의원에 도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러셀이 여성해방에 열심인 것은 J. S. 밀의 영향이 컸다. 사실 J. S. 밀은 러셀의 아버지 존 러셀 경의 친구였다. J. S. 밀은 러셀의 정신적 대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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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 밀
그러나 러셀은 여성의 참정권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결혼제도에 반대했고, 자유연애를 옹호했다. 그가 1929년에 쓴 <결혼과 윤리>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계약결혼과 혼전동거는 옳다. 사랑은 자유롭고 자발적일 때 성장하며 의무라고 생각하면 죽는다. 따라서 법률로 옭아매는 결혼은 실패하며 도덕이 엄격할수록 성매매는 성행하므로 남녀 간 자유연애만이 답이다.”

그는 결혼 제도를 반대하고 ‘자유연애’를 옹호해 많은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 뉴욕대학의 교수로 취임 초청을 받았으나 보수적 기독교와 정치가들은 무신론자인 그의 종교관과 특히 그의 비도덕성을 문제 삼았다.

그들은 특히 <결혼과 윤리>를 비판했다. 러셀은 끝내 교수 자리를 얻지 못했다. 법원에서 무신론자에게 교수 자리는 적합하지 않다는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법정에서 고발 대리인은 그를 이렇게 비난했다.

“방탕하고 음탕하며 호색적이고 음란하고 에로틱하며 색정적이고 위엄이 없고 편협하고 허위이고 도덕의 흔적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러셀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자유연애를 주장했지만 사실 결혼 제도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평생 네 번의 결혼을 했다. 그가 이렇게 네 번 씩 결혼하게 된 것은 사랑에 대한 갈구 때문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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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경의 러셀.
“나는 사랑을 구하려고 애쓴다. 첫째, 사랑은 황홀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종종 이 몇 시간의 충일감을 위해 나의 전 생애, 아니 앞으로 내 앞에 펼쳐 질 생애까지도 포기할 정도로 강렬한 황홀감을 만끽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또 다른 이유에서 나는 사랑을 구하려고 노력하였다. 사랑은 고독으로부터 건져내 주기 때문이다.”

그가 사랑을 구하던 이유

러셀은 첫 번째 부인을 17세 때 알게 되었다. 앨리스라는 이름을 지닌 그녀는 그때 당시 드물게 해방된 여성이자 자유연애 지지자였다. 러셀은 그녀와 오랫동안 순결한 약혼 기간을 지낸 후에 결혼한다.

러셀은 이 첫 번째 부인과 몇 년 못가 헤어졌다. 그는 자전거 여행 도중 그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식어 버렸음을 깨닫고, 그녀와 헤어졌다. 그 후 그는 오토네라는 유부녀와 교제도 하고, 다른 여자들과도 교제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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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부인과 함께한 러셀.

그 중 콜레트라는 여자에게 호감을 가졌으나 그녀와 결혼을 하지 않았다. 러셀은 49세가 되던 해에 앨리스와 정식으로 이혼하고 도라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과 두 번째 결혼을 했다. 그는 도라에게서 아들과 딸을 얻었다. 그는 도라와 함께 베이컨 힐 실험학교를 설립했다.

온건한 반정부적 정신을 바탕으로 한 이 학교를 통해 학생들을 체제로부터 자유롭게 길러내고자 했던 러셀의 교육적 시도는 영국사회에 충격과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새로운 적들도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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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컨 힐 학교.

러셀은 두 번째 도라와의 결혼 생활도 끝까지 유지하지 못했다. 63세에 도라와 이혼하고, 그는 자신의 조수였던 패트리시아 스페스라는 여성과 결혼한다. 이 여성에게서 그는 아들 한 명을 얻었다. 77세 되던 해 그는 패트리시아 스페스와도 이혼을 한다. 러셀은 이때 심정을 이렇게 털어 놓았다.

“1949년 아내가 내게 싫증이 난다고 심증을 털어 놓았을 때 우리의 결혼은 끝장났다.”

러셀은 80세가 될 무렵에 다시 한번 결혼을 한다. 그의 네 번째 부인은 매력적인 모습의 에디트였다. 그때 에디트는 50세였다. 그는 긴 생애 동안 그가 추구한 사랑에 대한 갈망이 그녀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수학을 만나다

여러 여성들과 교제하고 네 차례의 결혼을 하면서 러셀이 이렇게 평생 사랑을 갈구하게 된 까닭은 일찍이 부모를 여윈 탓도 있을 것이다. 그는 영국의 유명한 귀족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존 러셀 경은 빅토리아 시대 때 2번이나 수상을 지낸 유명한 정치가이자 자유사상가이었다. 그러나 그는 2살 때 어머니 앰벌레이를 잃었고, 3살 때 아버지 존 러셀 자작마저 사망했다. 그는 형과 함께 할머니 슬하에서 컸는데, 조부는 그가 6세 때 사망을 했다.

그는 독실한 청교도인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는 정규 교육을 받지 않는 대신 집에서 가정교사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는 내성적인 성격에다 비사교적인 성격을 지녔으나 호기심은 매우 왕성했다. 그는 특히 수학에 재능을 보였다. 수학은 러셀에게 최초의 정신적 사랑이었다. 그는 11살 때 유클리드 기하학을 읽고 받은 충격을 후에 이렇게 토로했다.

“첫사랑처럼 숨이 막히는 듯 한 내 인생의 가장 커다란 사건 중 하나였다.”

<다음 호에 계속>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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