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사람 죽은 책

책으로 보는 눈 [86] 최종규l승인2009.05.18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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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신촌에 있는 헌책방 아저씨와 저녁을 먹었습니다. 헌책방 아저씨는 당신 마음 속에 품은 꿈을 조금씩 키워 나가고 있었는데, 헌책방 문을 연 열 해째 되는 올해에 터뜨렸다면 터뜨렸고 저질렀다면 저지르는 일을 하나 했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 흐름이며 한국 땅에서, 인터넷도 아닌 매장으로 헌책방을 한 군데 더 꾸리기로 했다더군요. 더구나 파주에다가.

지난날 출판사에서 편집장까지 했던 당신은 파주책도시를 보면서 ‘우람한 건물만 있는 메마른 곳’이라고 느꼈고, 이 느낌을 당신 자그마한 손길을 거들어 ‘사람이 쉬고 책이 쉬는 헌책방 하나’쯤 있으면 조금이나마 나아지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터무니없다면 터무니없는 꿈이지만 슬기롭다면 슬기로운 꿈이요. 아름답다면 아름다운 꿈이며 어린이 같다면 어린이 같은 꿈입니다. 소주잔을 들고 씨익 웃으면서 ‘잘하셨어요!’ 하고 힘을 보태어 드렸습니다.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밥집 텔레비전에서 장영희 교수 장례미사를 올리는 모습이 꽤 길게 나옵니다. 지난 5월 9일 돌아가신 서강대 영문과 교수인 장영희 님은 돌아가신 날부터 여러 날에 걸쳐 크게 눈길을 끌고 사랑을 받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네 지식인 가운데 또 대학교수 가운데 그리고 수필문학을 하는 분 가운데 이토록 여러 날에 걸쳐 꽤 크게 눈길을 끌던 분이 있었나 떠올려 봅니다.(인터넷 검색 1위까지 차지하면서) 글쎄, 장영희 교수 아버님인 장왕록 박사도 이만큼 사랑받지 못한 듯한데. 아무래도 장영희 교수가 ‘목발 짚던 장애인 교수’라서?

신문이며 방송이며 장영희 교수가 ‘장애인이었음에도 얼마나 애썼고 예뻤고 밝았고 싱그러웠는가’를 떠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장애인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 벽이 얼마나 높은지’는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죽은’ 장영희 한 사람 기리는 데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산’, ‘살아 있는’, ‘살아가는’ 수많은 또다른 장영희한테는 눈길 한 번 안 주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한국땅에서는 ‘앞 못 보는’ 사람은 사법시험조차 치를 수 없음을 어느 누구도 모르고 있습니다.

저녁밥을 비운 다음 헌책방으로 돌아가 책을 더 고릅니다. 아는 분한테 선물해 줄 책을 하나 고르고, 제 마음을 살찌우고자 저한테 선물할 책을 하나 고릅니다. 아는 사람만 아는 가운데 조용히 사라진 교육잡지 <처음처럼> 1호와 2호가 보여 집어듭니다. 1호와 2호에는 함석헌, 김정환, 홍순명, 송준재, 성래운, 박형진, 페스탈로찌, 야누스 코르착 같은 이름이 도드라져 보입니다. 제대로 길을 걸었던 교육잡지이기 때문에 1호와 2호부터 ‘김정환’이나 ‘성래운’ 같은 나라 안 어르신 글을 담는 가운데, ‘페스탈로찌’와 ‘야누스 코르착’ 같은 나라 밖 어르신 글을 담았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나라에서 교육을 한다는 분들조차 이런 이름을 낯설게 여깁니다. 성래운 님이 돌아가셨을 때에도 그랬지만, 김정환 님이 더 나이를 잡숫고 세상을 떠나는 날에도 사람들은 ‘누가 죽었어? 그런데 뭐?’ 하고는 시큰둥해 하리라 봅니다.(시인이 아닌 교육자 김정환 님입니다)


최종규 1인 잡지 <우리 말과 헌책방> 내는 사람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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