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은 정열의 노예이다”-러셀(3)

철학여행까페[72]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9.06.22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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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 그는 영국 노동당의 비공식 당원이 되어 볼셰비키 혁명 후의 소련의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다. 그는 레닌과 트로츠키 등 혁명 지도자들과 만나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레닌과 장시간의 대화를 나누었지만, 기대와 달리 실망을 했다. <반속적 에세이>에서 그는 그때를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레닌을 만났을 때 나는 내가 기대한 것보다 위인이라는 인상은 훨씬 덜 받았다. 내가 가장 뚜렷하게 받은 인상은 괴팍한 고집과 몽고인 같은 잔인성이다. 내가 그에게 농업에 있어서의 사회주의에 관하여 질문을 하니까 그는 자기가 어떻게 가난한 농민들을 선동해서 부유한 농민들과 싸우게 하였는가를 기분 좋게 설명하고, ‘가난한 농민들이 부유한 농민들을 가장 가까운 나무에 목매달아 죽이도록 했지. 하하’ 라고 말하였다. 껄껄거리는 그의 웃음소리를 듣고 학살당한 사람들을 생각하니 그만 나는 등골이 써늘하였다.”

이동희
레닌.
레닌을 만난 러셀


러셀은 신생 국가 소련에서 돌아 온 후 중국 북경으로 떠났다. 그는 북경대학 철학과 초빙교수로 1년간 북경에 체류했다. 러셀은 중국 곳곳을 여행하면서 강연을 했다. 러셀의 강연을 인상 깊게 들은 사람 중에는 젊은 모택동도 있었다. 모택동은 러셀의 강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에 남기기도 했다.

“러셀은 장사에서 열린 한 강연에서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우호적이고, 노동자와 농민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유산계급의 의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교육방법을 마련해야 한다면서 그 방법을 사용하면 자유를 제한하거나 전쟁과 유혈 혁명에 의존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모택동은 러셀의 입장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는 러셀과 달리 교육 방법을 통해서는 결코 자본가를 변화시킬 수도 없고, 자본주의도 무너뜨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러셀은 소련에서와 달리 고대 중국의 문명과 중국인의 생활양식에 커다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중국이 자신의 가치를 버리고, 서구의 생활을 따라 간다면 세계의 미래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서구의 생활방식은 투쟁과 착취, 끊임없는 변화, 욕구불만, 그리고 파괴를 강력하게 요구한다. 파괴를 위한 능률주의는 결국 인류를 전멸시킬 것이다.”

1921년 9월에 영국으로 돌아 온 러셀은 앨리스와 이혼하고 도라 블랙과 결혼하였다. 러셀은 정치적 활동에도 적극 참여해 영국에 온 1922년과 1923년에 노동당으로 입후보했으나 연거푸 낙선하였다.
여권주의, 평화주의 등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입장을 띤 그의 정치적 활동을 사람들은 싫어했다. 심지어 지역의 집주인들은 그에게 세를 주는 것 조차 꺼려했다. 러셀은 유산으로 자녀들을 위한 집을 사고, 나머지 대부분의 재산을 캠브리지 대학과 그 중의 한 여자 대학에 기부했다.

이동희
러셀.
이 이후부터 그는 스스로 돈을 벌어야 했다. 그는 여러 차례 미국으로 강연여행을 떠났고, 대중적인 에세이도 썼다. 그때 그가 쓴 대표적인 에세이들인 <나는 왜 크리스천이 아닌가?>(1927), <결혼과 도덕>(1929), <행복의 정복>(1930)은 지금까지 읽히고 있다.

지금으로 보면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지만, 이 책들은 당시 독자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러셀은 자신이 왜 기독교인이 될 수 없는가에 대한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방했고, 성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옹호했기 때문이었다.

러셀은 권위주의에 대해 맹목적으로 복종하지 않기 위해서는 초기 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을 굳게 믿고 있었다. 처음 그를 소개했던 글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도라 블랙 사우스 다운즈에 있는 형의 집을 빌려 자기들의 자녀와 함께 공부할 스무 명 가량의 어린이를 모아 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이며 반권위주의를 표방했다. 그러나 이 학교는 성공을 보지 못했다. 러셀이 <자서전>에서 언급했듯이 너무나 문제아들만을 많이 모아들였고, 자유와 권위 사이에서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러셀은 도라와 헤어졌을 때, 이 학교의 경영권도 포기하였다.

권위주의에 도전하다

1938년 가을에 그는 시카고 대학의 객원교수가 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미국에서 그의 생활은 그렇게 평탄하지는 않았다. 뉴욕시립대학의 교수로 초빙되었지만, 그를 모함하는 자들은 러셀의 저작을 ‘호색’, ‘음담패설’, ‘허위’ 등으로 가득 차 있다고 고소한 것이다.

특히 그들이 집중적으로 비난한 것은 <결혼과 도덕>이었다. 가톨릭 신자인 판사는 “러셀의 교육이 학생들로 하여금 범죄를 저지르도록 자극할 것”이라는 불합리한 판결로 원고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

그는 이 재판으로 교수 자리를 잃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영향을 끼쳐 미국의 다른 대학들도 그를 초빙하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만다. 하버드 대학교만이 윌리엄 제임스 기념 강연에 그를 초빙했던 계획을 취소하지 않고 용기 있게 그에게 강연을 맡겼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학기가 끝난 후, 러셀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이때 억만장자였던 반즈 박사가 자기의 재단에서 5년간 강의를 해달라는 제안을 해 왔다. 러셀은 반즈 재단에서 강의를 했으나, 강의가 불충실하다는 이유로 2년만에 계약을 파기당한다.

러셀은 반즈 박사를 상대로 불법해고에 대한 소송을 진행해 승소한다. 그가 이 재단에서 행한 강의들은 1945년에 <서양철학사>로 출간되었다. 이 <서양철학사>는 대중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그 덕택에 러셀은 재정상의 불안을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되었다.

이동희
아인슈타인
1944년 10월 그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캠브리지 트리니티 대학의 특별연구원으로 재직한다. 그는 별다른 의무도 없이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1948년에 그는 <인간의 지식: 그 범위와 한계>라는 책을 펴냈다. 그는 이 책에서 귀납의 문제에 대해 전면적으로 도전하고 있다.

러셀은 2차 세계대전 때에는 평화주의자의 입장을 떠나, 소련에 대한 선제전쟁을 해야 한다는 입장에 동조하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소련이 핵을 사용해 되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영국 정부는 러셀의 반공주의를 적절히 이용했지만, 러셀의 명성은 이미 국제적으로 상당히 높아 있었다. 1949년에 그는 영국정부로부터 메리트 훈장을 받았고, 1950년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이 노벨문학상은 특히 그토록 비난을 받았던 <결혼과 도덕> 때문에 주어진 것이었다.

러셀은 1949년 세 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1952년에 수년 동안 알고 지내던 미국인 여성 에디스 핀치와 결혼하였다. 그는 이 결혼에 매우 행복해 했고,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던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이런 글까지 썼다.

‘이제 늙어 종말에 가까워서야/비로서 그대를 알게 되었노라
그대를 알게 되면서/나는 희열과 평온을 모두 찾았고/안식도 알게 되었노라
그토록 오랜 외로움의 세월 끝에/나는 인생과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아노라
이제, 잠들게 된다면/아무 미련 없이 편히 자련다.’

결혼 후에 안식을 찾았지만 러셀은 정치적 활동으로 더욱 분주했다. 그는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 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막고자 동분서주했다. 제3차 세계대전에서는 핵폭탄이 사용되고, 그로 인해 인류의 대부분이 사멸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핵전쟁의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 <상식과 핵전쟁>(1959), <인류에게 미래는 있는가?>(1961)를 썼다. 그는 1955년에 아인슈타인을 설득해 평화를 위한 협력을 지지하는 선언에 서명하게 했고, 평화 회의를 발족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1958년에는 ‘핵비무장운동’의 회장이 되었다. 그는 2년 후에 회장직에서 물러나 시민불복종 운동을 지도하였다. 러셀은 1961년에 집단 농성을 주도했다는 협의로 기소되어 2개월의 금고형을 선고 받았다. 그때 그의 나이 89세였다.

건강상의 이유로 러셀은 형무소 내의 병원에 1주일간 구금되어 있다가 풀려났다. 풀려 난 후에도 러셀은 정치적 활동을 더욱 확대해 세계 곳곳의 국제적 분쟁에도 개입했고, 정치범들을 위한 석방 운동도 전개했다.

이동희
샤르트르.
평화와 인권을 향한 발걸음


1963년에 그는 버트란트 러셀 평화재단을 창립했다. 그 때 그의 나이가 91세였다. 그는 재단기금을 위해 그가 소장하던 고문서를 온테리오의 맥매스터스 대학에 팔았다. 러셀은 시민 재판이라 할 수 있는 러셀 법정을 열어 1966년에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와 함께 미국의 베트남 전쟁범죄에 대해 조사하기도 했다. 이 러셀 법정은 그가 사망한 후에도 평화와 인권침해에 대해 재판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

세계 평화를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던 러셀은 유행섬 감기로 1970년 2월 2일에 9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는 흄이 말한 “이성은 정열의 노예이며 또한 그런 상태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을 몸소 실천한 사상가였다.

그에게는 그 누구보다 날카로운 철학적 지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인류의 평화와 행복에 대한 그의 열정을 실현시키기 위한 노예로 사용하였다. <러셀편 끝>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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