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중 만났던 80년 광주

[내인생의 첫수업] 정범구l승인2009.07.27 12:10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대학생들 중 광주 민주화 항쟁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이 꽤 많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있었다. 수많은 이들이 광주의 ‘충격’으로 삶이 바뀌거나 아예 자신의 삶을 던져 버렸던 일들이 이제는 한낱 과거 역사로 묻혀가고 있는걸까?

하긴 당시대로선 견뎌 낼 수 없는 고통이고 재앙이었던 한국전쟁 전후의 뼈저린 비극도 이젠 노년세대의 기억 속에나 남아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사람들의 삶과 기억에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갈 길을 수정하는 것이리라.

광주항쟁을 잊은 세대

내가 광주의 5월을 겪은 것은 독일(당시는 서독)에서였다. 그 전해인 1979년, 유신이 막바지 기승을 부리던 때 한국을 떠나 유학길에 올랐었다. 사회 전체가 거대한 감옥 같았던 유신 말기, 운이 좋게도(?) 독일 개신교 장학재단(OESW)의 초청으로 독일 유학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한국을 떠나던 날(1979년 10월 3일),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 씨가 뉴욕타임즈와의 회견에서 박정희 독재를 비판한 것을 빌미로 국회에서 제명 당하고, 그 이후에 부마항쟁이 일어나게 된다. 당시만 해도 국내언론은 철저한 보도통제 아래 놓여 있을 때라 우리는 부마항쟁의 진실을 알기 위해 당시 독일 보쿰대학 도서관에 들어오던 아사히 신문 등을 열심히 뒤지고 있었다. 부마항쟁의 흥분과 여진이 가라앉지 않고 있을 무렵, 이번에는 박정희 암살 소식이 독일 언론의 톱을 장식하였다. 미처 그 충격을 새기지 못하고 있을 때 연이어 벌어진 12.12사태, 그리고 이어서 다가온 ‘서울의 봄’!

독일 TV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젊은 학생들의 시위는 오랜 유신 독재에 지쳐 있던 내게 새로운 미래에 대한 전망과 기대를 갖게 하였다.

나의 독일 유학 초기 6개월은 이렇게 숨가쁘게 이어지는 한국에서의 격변에 정신이 팔린 채 지나갔다. 아! 그리고는 이윽고 광주 5월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그 때의 충격, 비통함,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 그러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채로 외국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어야 하는 무력감 등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던 나도 그때만은 정말로 하느님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깊은 회의와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당시 국내에 있던 많은 이들이 전두환 군부의 철저한 보도 통제 때문에 막상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던 반면, 독일에 있던 우리는 매시간 마다 생생하게, 그것도 칼라 TV로 전송되던 광주의 처절한 학살 현장을 두 눈 뜨고 보고 있어야만 했다. (내가 독일로 떠나던 당시까지만 해도 아직 한국은 흑백 TV시대였다)

전남 도청 앞 무덕관에 피묻은 태극기로 덮인 무수히 많은 관들을 보면서, 쓰러져 있는 청년들을 군인들이 철사 같은 것으로 교살하는 듯한 장면을 보면서는 내가 살아 호흡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아주 버겁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 때, 그 5월 광주, 그리고 그 자리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이들을 보면서 난 속으로 무수히 다짐하였다. 이제 앞으로의 내 삶은 저들이 못 다 이룬 꿈을 대신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속으로 무수히 다짐했다

살아 있었다면 미래에 대한 무수한 가능성을 안고 있었을 저들이 저토록 속절없이 죽어가고 있는데 나는 팔자 좋게 해외에 유학이랍시고 나와 있으면서 무엇을 한다는 것인지….

광주 5월은 나뿐 아니라 당시 독일에 나와 있던 많은 유학생과 교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유학생들 중 일부는 벼랑 끝 까지 몰린 조국의 민주주의를 구원할 수 있는 일들이 어떤 일들인지, 여러 가지로 고민하기 시작하였고, 그런 고민 중의 하나가 학술운동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조국의 당면한 현실을 깊이 있게 연구, 토론하는 모임들이 각지에서 시작되었고, 이런 모임에는 독일 뿐 아니라 프랑스나 영국 등의 유학생들도 참여하였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뒷날 ‘파리의 택시 운전사’로 유명해진 홍세화가 참여하였고, 영국에 유학 중이던 손학규(전 통합민주당 대표), 김대환(전 노동부 장관) 등도 참가하였다. 수적으로 다수를 점하였던 것은 아무래도 독일 유학생들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최종욱(국민대)과 최재현(서강대)은 김세균(서울대) 등과 함께 90년대 진보적 사회과학단체였던 ‘학술단체협의회’ 결성을 주도하였고 박호성(서강대) 등은 ‘참여연대’ 건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임수경 방북사건’에 연루(?)되었던 어수갑은 귀국하여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에서 활동하고 있고,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민교협)’결성을 주도하였던 박상환(성균관대)이나 박병섭(상지대) 등이 다 이 시기 독일에서 처절한 ‘존재의 고민’들을 함께 나누었다. 특히 박병섭과 정윤선(전 막스 플랑크 인스티튜트 연구원)등은 독일에서 자라나는 우리 1.5세와 2세들의 민족교육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광주에서 스러져 간 수많은 젊음들을 대신해 보겠다던 나는 곡절 많은 현실정치에 들어 와서 곡절 많은 삶을 살고 있을 뿐, 그때의 다짐을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지, 돌아보면 부끄러울 따름이다.

‘더 많은 민주주의’는 현재진행형

광주의 희생에 힘입어 한국에서는 군부정권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던 김대중이 최초의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루어 냈고, 한국 사회의 마이너리그 출신이었던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역사는 똑바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갈짓자를 그리거나 때로는 역진 하기도 하는 것인지, 지금 우리는 ‘민간 독재’를 우려하는 상황에 다시 와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책임이 있는 정치인으로서 나는 이명박 정부의 오만과 불통(不通)을 우려하는 한편으로, 과거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실책과 과오가 무엇이었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민주주의는 이루었으나 사회, 경제적 민주주의를 이루는 데는 실패하였던 과거 ‘민주정부’들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일, 이게 지금 우리 앞에 주어져 있는 과제가 아닐까 한다. 다시 광주로 돌아가든지, 6.10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4월 혁명의 정신으로 돌아가든지, ‘더 많은 민주주의’를 확보하는 문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의 문제이다.


정범구 민주당 대외협력위원장·전 국회의원

정범구  

<저작권자 © 시민사회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범구의 다른기사 보기

인기기사


여백
시민사회신문 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08288 서울특별시 구로구 새말로 93, 신도림태영타운상가2동 B105  |  대표전화 : 02-3143-4161  |  팩스 : 02-6737-1115  |   ingopress@ingopress.com
등록번호 : 서울 다 10706  |  등록일자 : 2013년 8월 26일  |  회장·논설주간 : 강상헌  |  발행·편집인 : 설동본  |  편집국장 : 양병철
후원계좌 : 국민은행 7788-01-04-375819 (시민사회신문)  |  청소년보호책임자 : 설동본
Copyright © 2007 시민사회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