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위한다, 고로 자유하다-사르트르(1)

철학여행까페[78]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9.08.31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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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키 작은 한 노인이 신문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신문은 마오이스트 성향의 신문 <인민의 대의>였다. 이 노인은 이 신문의 편집자로서 이미 경찰의 출두 명령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 노인은 경찰에 체포되기 위해 길거리에서 직접 신문을 판매했다. 곧 바로 경찰은 곧 이 노인을 체포하려 했고, 노인은 서슴지 않고 소위 ‘닭장 차’에 올랐다. 그러나 그 노인은 곧바로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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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
사르트르는 과거에도 여러 차례 시위를 벌인 적이 있었다. ‘전문시위꾼’인 이 노인은 프랑스가 낳은 유명한 철학자 사르트르였다. 그는 모국 프랑스에 반대해 알제리 해방을 지지했다. 그는 ‘알제리 전쟁에 있어서의 불복종의 권리’를 내세운 ‘121인의 선언’에 서명을 했다. 사르트르에 반대하는 재향군인회의 데모가 일어나 불복종죄로 그를 체포하라고 요구했다. 당시 이 소식을 들은 드골 장군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 풀어 주었다고 한다.

“볼테르를 체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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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테러로 부서진 사르트르의 아파트
치외법권적 존재 사르트르


드골의 배려 덕분에 그는 기소는 면했지만 그의 아파트에 폭탄세례가 이어졌다. 그러나 그 전에 다른 곳으로 이사해 화를 면했다. 폭탄세례가 있었지만, 그는 현실에 대한 발언과 참여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의 서문에서 유럽의 제국주의를 고발하고, 제3세계를 강력하게 옹호했다. 1965년에는 미국의 베트남 침공에 대해 미국을 방문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거리에서 시위를 벌인 적이 있다.

1966년에는 러셀과 함께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범죄를 고발하기 위해 국제재판정에 참가하기도 했다. 파리에서 발생한 68년 5월 혁명에서 학생들을 지지하고 시위를 주도했다. 그러나 드골의 발언으로 그는 체포되지 않았다.

사르트르는 드골의 정치적 입장을 줄곧 적대해 왔다. 통렬한 비판의 글을 쓰기도 했고, 발언도 했다. 드골은 그런 사르트르를 프랑스의 지성의 상징이자 양심인 ‘볼테르’로 선언한 것이다. 프랑스정부의 이미지를 고려한 조치였다.

이 선언으로 사르트르는 치외법권적인 존재가 되었다. <누벨 옵세르바퇴르>의 기자 장 모로는 시위대 전면에 섰던 시몬 드 보부아르, 장 폴 사르트르와 함께 경찰에 연행된 적이 있었다.

그는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의 신분을 확인한 경찰이 어떤 제재도 없이 이들과 함께 연행된 시위대를 풀어주는 것을 목격했다. 이러한 목격을 한 장 모로는 낙태합법화 운동을 위해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를 바람막이로 해서 ‘낙태 선언 343인’ 선언이라는 더 큰 시위를 준비하기도 했다.

드골이 ‘치외법권’적 존재로 인정한 이 사르트르는 누구인가? 사르트르는 1905년 6월 21일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프랑스 해군 장교였다. 그러나 그가 15개월 되었을 때 베트남 파견 때 걸린 열병으로 아버지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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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의 사르트르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는 외조부 집에서 자랐다. 외조부 찰스 슈바이처(Charles Schweitzer) 는 노벨평화상을 받은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의 작은 아버지였다. 어머니와 슈바이처는 사촌 지간이라, 그에게 슈바이처는 외당숙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별로 접촉이 없었다. 그러다 1962년 사르트르의 아파트가 테러를 당하자 슈바이처가 그에게 편지를 보내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사르트르가 반핵 운동을 벌일 때 슈바이처는 전폭적인 동감을 표시했다.

슈바이처의 작은 아버지, 다시 말해 사르트르의 외조부는 고등학교 독일어 교사였다. 외조부는 어린 사르트르에게 수학과 고전문학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사르트르는 외조부의 서재에 가득 찬 책들을 통해 세계를 발견한다.

키가 작고 사팔뜨기였던 그는 같이 놀 친구 보다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책을 읽고 글쓰기는 것을 더 좋아했다. 사르트르는 만년에 쓴 자전적 소설 <말>에서 어린 시절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내가 세계를 만난 것은 책 속에서였다… 나는 나의 종교를 발견한 셈이다. 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책에서 종교를 발견하다

사르트르는 파리에 있는 앙리 4세 리세에 들어갔다. 얼마 뒤 어머니가 재혼하고 나서는 라 로셀로 옮겼다. 외조부의 서재에서 보냈던 나르시즘적인 자기 행복은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깨지고 말았다.

사르트르는 라 로셀에서 보낸 시기를 ‘내 평생 최악의 시기’였다고 말을 했다. 이 시기에 사르트는 소위 사춘기를 겪은 것 같다. 어머니의 재혼으로 배신감을 느꼈고, 의부와 겉으로는 사이가 좋았지만 속으로 거리를 두었다. 자기가 사팔뜨기에 못생겼다는 것을 느닷없이 깨닫고 불안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하고, 이러한 생각을 죽을 때가지 바꾸지 않았다.

사르트르가 문학이 아니라 철학을 전공하기로 결심을 굳힌 것은 1922년쯤에 베르그송의 <의식의 직접적 소여에 관한 시론>를 읽은 다음부터였다. 그는 계시를 받는 듯한 충격적인 경험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철학이란 진실을 가르쳐 주니 정말로 대단한 것이로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한 권의 책이 되어 하늘로부터 떨어진 진실 앞에서 나는 생각했다. 또 다른 진실들이 떨어지게 해야 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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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와 보봐르
그는 1924년 수재들만 모이는 전통의 명문 학교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다. 4년의 재학 기간동안 강의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메를로 퐁티, R.아롱, 캉길렘, 장 이폴리트, 어린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였던 니장 등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는 고등사범학교 시절을 “입학 첫날부터 독립의 시작”이고 “4년간의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회상한다. 그러한 대가일까. 1928년 그는 교수자격시험에서 낙방을 하고 만다. 너무 독창적인 생각 때문에 낙방되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낙방의 결과로 친구 사촌누이 동생과의 약혼이 취소되었다. 미래의 장인이 될 뻔한 사람이 고등사범학교 졸업생이지만 낙방한 사람에게 딸을 줄 수 없다는 이유였다.

사르트르는 다음 해에 다시 교수자격 시험을 준비하면서 보부아르를 만났다. 둘 사이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상호 간의 자유와 사랑을 동시에 실현시킬 수 있는 2년간의 계약 결혼에 들어간다.

이 계약 결혼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2년간의 계약결혼 후에 두 사람은 평생 반려가 된다. 교수자격 시험에서 사르트르는 수석을, 보부아르는 차석을 차지했다. 그는 1929년 11월부터 생시르 육군사관학교에서 기상관측병으로 18개월 동안 군 복무를 했다.

병역을 마친 후 르아브르 소재 고등학교에 철학교수로 발령을 받았다. 이때 그는 보부아르와의 정식 결혼을 고려했으나, 결혼 제도가 자유를 제한하는 부르주아의 제도로 보여 포기하고 말았다.

1933년 9월에 그는 베를린에 있는 프랑스 연구소에서 1년 동안의 연구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후설을 연구하였다. 베를린에서 돌아 와 <자아의 극복>(1934), <상상력>(1936)을 출간했다. 이 책은 당시 사르트르가 현상학에 대한 심취해 낳은 저술이었다.

1937년에 그는 파리에 있는 학교로 옮기게 된다. 보부아르는 1년 전에 이미 파리에 와 있었다. 그들은 몽파르나스 거리의 같은 호텔에 기숙했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층에 있는 방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자유와 사랑을 동시에 실현시킨다는 당초의 목표를 지켜 나갔다.

이 해에 그는 단편소설 <벽>을 발표했다. <벽>은 대중들과 비평가들의 호응을 받았다. 다음 해에 첫 장편 소설 <구토>가 발표되었다. <구토>는 1931년부터 구상한 소설이었다.

1936년에 원래 뒤러의 작품에서 따온 이름 <멜랑꼴리아>로 갈리마르 출판사에 투고했지만 출간되지 못했다. 제목을 바꾸고, 많은 부분을 삭제하고 수정을 가해달라는 출판사의 요구를 들어 준 다음 출판할 수 있었다.

존재론적 우연성의 체험을 그대로 기술한 이 작품은 그를 작가로서 유명하게 만들었다. 노년의 사르트르는 이 소설이 자기의 최고의 작품이라고 스스로 평가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앙트완느 로캉탱은 뚜렷한 직업 없이 18세기 기인 롤르봉에 대한 연구를 한다.

그가 부빌르라는 도시에서 일기를 쓰는 형식으로 이 소설은 구성되어 있다. 로캉탱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사유가 아니라 오히려 구토라는 것을 발견한다. 구토를 통해 그는 실제로 존재의 부조리를 발견한다. 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없는 채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 근본적인 부조리!

“우리는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거북해하는 수많은 존재들 가운데 있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어느 누구도 거기에 있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당황하고 막연히 불안해 하는 존재들은 다른 존재들에 비해 자신을 잉여존재라고 느낀다… 부조리란 말이 지금 내 펜 끝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아무것도 말로 분명하게 표현하지 못한 채 나는 ‘존재’의 열쇠를, 내 ‘구토’의 열쇠를, 내 자신의 삶의 ‘열쇠’를 찾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그 후에 내가 파악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은 이 근본적인 부조리로 귀결된다.”(구토 중)

이 부조리한 세상을 더욱 부조리하게 만든 것은 제2차 세계 대전이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은 사르트르에게 결정적 전기가 된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인간의 정치적 행위에 대해 눈 뜨게 된다.

그는 1939년 9월 참전했다가 1940년에 독일군의 포로가 된다. 1941년에 수용소를 탈출, 파리에 돌아왔다. 파리에서 다시 철학교수로 복직했고, 메를로 퐁티와 함께 ‘사회주의와 자유’라는 비밀 저항운동 단체를 조직하여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다.

독일 치하인 1943년에 유명한 희곡 <파리떼>를 발표했다. <파리떼>를 무대에 올리기 위한 총 연습 때 그는 카뮈와 알게 되어 곧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이미 그는 카뮈가 쓴 <이방인>에 대한 글을 쓴 적도 있다.

이동희
까뮈
카뮈와의 만남과 대립


카뮈도 사르트르처럼 문학과 철학을 함께 추구했다. 그와 카뮈는 프랑스 실존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이 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날카로운 논전이 벌어진다. 카뮈가 <반항적 인간>(1951)이라는 책을 내자 그것을 사르트르 진영에서 공격한 것이었다.

사르트르가 주도한 <현대>지에 프랑시스 장송이 카뮈가 혁명을 부정하는 반공적 보수주의라고 평가한 것이다. 사르트르는 우정 때문에 카뮈에 대한 논평을 보류했다. 그러나 카뮈는 자신에 대한 논평이 오직 역사만을 믿는 폭력주의자들의 설교라고 사르트르에게 직접 공격을 했다.

그러자 역사를 위한 투쟁을 거부한다는 것은 현상유지를 바라는 것이라는 사르트르의 날카로운 반격이 가해졌다. 그렇게 두 사람은 결별을 했다. 또한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 전쟁에 대한 논쟁도 두 사람을 더욱 갈라 놓았다.

이 전쟁을 두고 두 사람은 이견을 보였다. 이때 사르트르는 소비에트와 공산당 좌파에 경도되어 있었다. 한국전쟁에 대해 그는 미국의 사주에 의한 북침이라고 믿었다. 카뮈와 메를로퐁티는 소련 공산당의 침략성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보였다.

메를로퐁티는 사르트르를 “공산주의라는 허깨비에 동조하는 울트라 볼세비즘”이라 비판했다. 사르트르도 이들에 대해 가시 돋친 비판을 했다. 이 일로 절친한 메를로퐁티와도 결별했다. 카뮈는 1960년 교통사고로 죽었다. 사르트르는 1960년 1월 주간지 <옵세르바퇴르> 505호에 카뮈에 대한 추도사를 다음과 같이 썼다.

“그와 나는 불화를 겪었다. 불화란 아무것도 아니고-설사 절대로 다시 만나지 않는다 해도-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이 비좁은 작은 세상에서 서로 시선을 잃지 않은 채 함께 살아가는 또 다른 방식일 뿐이다… 그는 현 세기 안에서 ‘역사’에 반대하며 모럴리스트라는 기나긴 대열의 현재적 후예를 대표했고, 그의 작품은 프랑스 문단에서 가장 독창적인 어떤 것을 구성했다… 그가 무엇을 하고 어떤 결정을 내리든 간에, 카뮈는 언제나 우리 문화영역의 중심세력으로 계속해서 남아 있을 것이며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프랑스와 금세기의 역사를 표현해 냈을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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