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사르트르(2)

철학여행까페[79]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9.09.07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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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주저 <존재와 무>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표절인가? 흔히 말하는 대로 이 책은 <존재와 시간>에 대한 사르트르의 창조적 오독인가? 그러나 <존재와 무>에 대한 그러한 평가는 부당한 것이다. <존재와 무>는 비록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지만, 철학자로서의 사르트르의 독창성과 기발함이 담겨 있는 책이다.

이동희
친구들과 담소하는 사르트르

<파리떼>를 발표하던 해에 그는 첫 번째 주저 <존재와 무>도 출간했다. 이 <존재와 무>는 725쪽에 달하는 상당히 두꺼운 책이다. <존재와 무>의 무게가 1kg이어서 저울추로 사용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는 이 방대한 책을 비교적 짧은 시간에 썼다. <존재와 무>는 대단히 추상적이고 난해하다. 그러나 유명한 카페 종업원, 동성애자 등에 대한 현상학적 기술은 소설처럼 생생하고 구체적이다.

<존재와 무>는 현상학적 존재론의 시도이며 존재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한다. <존재와 무>에서 그는 즉자존재, 대자존재를 구분한다. 즉자 존재는 의식과는 무관한 그 자체로 존재하는, 돌멩이나 의자와 같은 사물의 존재이다.

즉자존재는 자기 자신도, 타자도 의식하지 않고 그대로 존재한다. 돌멩이도 그 자리에 놓여 있을 때는 어느 누가 고의적으로 갖다 놓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의자도 의자를 만든 목수의 의도가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는 그 이상일 수 없다. 그러한 것이 그대로 그들의 본질을 결정한다. 이에 반해 대자 존재는 자기에 대해 의식하는 존재를 뜻한다.

다시 말해 인간존재를 뜻한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다. 인간은 자신이 돌멩이나 의자와 다른 존재라는 것을 의식한다. 인간은 돌멩이도 아니며, 목수가 그 용도를 미리 정해 놓은 의자도 아니라는 것도 안다.

여기서 사르트르는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인간의 본질을 미리 규정하는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는 옹기장이와 같은 하느님은 없으며 따라서 옹기처럼 정해진 인간의 본질도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고서야 그리고 나서야 자신의 본질을 묻는다. 그러므로 사르트르는 이렇게 주장한다.

이동희
사르트르와 보봐르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인간은 이제 자신의 본질이 아직 규정되지 않은 ‘무’라는 것을 안다. 아무 것도 규정되지 않았기에 인간 존재는 ‘자유’다.아무 것도 규정되지 않은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운명처럼 주어져 있다. 이제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선택해야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갈 수도 있으며, 사물처럼 주어진 대로 그냥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자유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러한 ‘자유’를 의식할 때 인간은 불안을 느낀다. 불안은 공포와 다르다. 불안은 나 혼자 선택해야 하며 그 자신의 선택에 전적으로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식할 때 발생하는 감정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이러한 불안을 회피하기 위해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를 감추고 즉자적인 상태로 살아가고자 한다. 사르트르는 이것을 자기기만이라 부른다. 사르르트는 <불안>을 인간의 자유를 실현하는 기획의 동력으로 삼는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러기에 불안을 느낀다. 나의 선택은 나에게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도 해당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결혼을 선택한다면, 그러한 선택은 결혼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지지하는 것이 된다. 이 인간의 자유가 실현되는 상황은 결국 타자와 연관될 수밖에 없다. <존재와 무> 3부는 대타 존재, 즉 타자와의 관계하는 존재를 기술한다.

인간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함께 살아간다. 그런데 타인과의 관계는 항상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당황하게 만든다. 우리는 타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우리는 대상으로서 경직화된다. 우리는 타인의 판단에 내맡겨진다. 타인은 우리를 이렇게 저렇게 객관화시키고 대상으로 고정시켜 버린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타인을 이렇게 말한다.

“타인은 지옥이다.”

이동희
사르트르와 체 게바라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타인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타인의 판단에 우리를 내맡겨야만 할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그것은 더 이상 타인에 판단에 기대지 않고, 우리가 의식적으로 우리 자신의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기획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읽고 이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공산주의자들과 기독교인들은 <존재와 무>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사르트르에 대해 멋대로 비판을 했다. 사르트르는 자기 철학을 올바르게 알리기 위해 1945년에 강연을 행했다. 강연 제목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였다.

이 강연에는 강연장의 의자가 부서지고, 몇 명이 기절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여 들었다. 이 강연 이후로 실존주의가 건초 더미에 불붙듯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의 전도사이자 슈퍼스타가 되었다. 사실 사르트르는 처음에 실존주의란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말을 처음 쓴 사람은 가브리엘 마르셀이었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칼 야스퍼스, 마르셀을 유신론적 실존주의로, 하이데거와 자신을 무신론적 실존주의로 규정했다.

이동희
말년의 사르트르
실존주의 유행을 부른 강연


강연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 대해 항상 불만을 품고 있었다. <존재와 무>는 존재론을 다루었지만, 인간 자유의 조건인 경제적, 사회적 관계에 대한 연구는 이루어지 않았다. 그는 두 번째 철학적 주저인 <변증법적 이성 비판>에서 실존주의와 맑스주의를 결합시키고자 했다.

이 책은 1960년에 발표되었다. 사르트르는 “사회적 세계에서 인간을 다시 발견하고, 인간의 실천과 특정한 상황을 토대로 해서 사회적 가능성과 대결하고자 하는 인간의 기획을 추적해 이해하고자 하는 인식을” <변증법적 이성 비판>의 과제로 내 세운다. 사르트르는 맑스주의가 개인주의를 선험적인 사회구성의 전체적 목적에 복종시킨다고 비판했다. 그는 맑스주의의 도그마를 부수기 위해 실존주의가 맑스주의에 통합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변증법적 이성 비판>을 발표하기 이전에도 수많은 평론과 논문 그리고 소설과 희곡을 발표했다. 1년에 몇편 씩 발표할 정도로 엄청난 글을 써댔다. 마치 글쓰기의 화신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글쓰기에만 몰두한 것은 아니었다. 플레이보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여러 여자들과의 염문도 끊이지 않았다. 매일 다른 여자들과 약속을 정해야 할 정도로 그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소련, 중국, 쿠바, 브라질 유고 등 세계 곳곳을 방문했다. 쿠바에서는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를 알게 되고, 그 나라의 혁명을 전체가 따라야 할 모범으로 찬양했다. 1961년에 그는 알제리 출신의 흑인 프란츠 파농을 만난다. 그는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의 서문을 썼다. 그리고 알제리 독립을 지지했다. 그 대가로 그의 아파트에 폭탄테러가 이어졌다.

1963년에 자전적 소설인 <말>이 발표되었다. 이 작품으로 사르트르에게 노벨문학상이 수여되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노벨문학상을 거절했다. 그는 노벨상을 받는 것은 문학을 등급화시키고 제도권 내에 편입시키는 일이며, 동서양 진영에서 한 진영에 편향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레닌 상을 준다고 해도 그는 거절했을 것이라고 말을 했다.

1964년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러셀과 더불어 국제 재판을 열어 미국의 전쟁범죄를 비판했다. 사르트르는 1968년에 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68학생운동이 진실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기폭제라고 믿었다. 그래서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경찰의 진압작전이 시작되자 그는 폭력을 옹호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보 때문에 극좌파와 사르트르는 얼마 동안 동지 관계를 형성한다. 그는 1970년에 극좌파 마오이스트 신문인 <인민의 대의>의 주간이 되어 이 신문을 팔러 거리로 나서기도 했다. 1973년에 그는 또 다른 신문인 <해방>을 창간했다. 그는 74년에 유럽을 뒤흔들었던 테러리스트 조직 적군파의 리더 바더를 서독에서 만났다. 그는 73년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테러리즘을 비판했지만 그들을 혁명가로 옹호했다. 테러리즘을 반대하는 사르트르를 만난 자리에서 바더는 이렇게 말을 했다.

“나는 당신을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재판관이군요.”

이동희
사르트르의 무덤
“그 자체가 하나의 국가”


사르트르의 영향력은 줄어들고, 이미 그의 시대는 지나가고 있었다.

사르트르의 엄청난 필력(筆力)은 이 무렵 고갈되고 있었다. 그의 정신은 여전히 기민하고 적극적이어서 인터뷰를 하고 영화 시나리오를 썼으며 윤리학에 관한 책도 썼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충실한 생산성을 지닌 비상한 위력을 펼칠 수 없었다. 눈이 멀고 건강이 악화되어 1980년 4월 15일 폐암으로 74세의 나이에 죽었다. 약 2만5천여 명이 참석하여 매우 성대하게 치러진 그의 장례식과 파리에서 열린 그의 장례행렬에는 5만명이 넘는 군중이 뒤따랐다. 마치 빅토르 위고의 장례식을 연상시켰다. 그의 훌륭한 선임자 위고가 받았던 국장(國葬) 승인은 없었다.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었고, 사르트르가 항상 그의 글로써 권리를 지켜준 사람들이었다.

앙리 레비가 말한 것처럼 사르트르는 그 자체가 하나의 국가였다. 그는 프랑스의 문화의 대표적 아이콘이었지만, 프랑스인이 되기를 거부했다. 그는 항상 행동했고 실천했다. 그는 치외법권적인 존재였지만, 항상 옳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양심에 따라 행동했고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참여했다. 그는 자유 그 자체였다.

철학자 들뢰즈는 사르트르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사르트르가 있었다. 후덥지근한 좁은 방에 갇혀 있던 우리들에게 그는 신선한 공기였으며, 시원한 뒷마당의 상큼한 바람이었다.”

<사르트르 편 끝>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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