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에 만난 그의 질긴 삶

[내 인생의 첫 수업] 홍세화l승인2009.09.21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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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스물 나이에 그분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그저 평범한 ‘범생’이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고등학교에서 영어보다 수학을 더 잘하던 나는 당시 유행을 따라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했다.

그분을 만나지 않았다면 내 삶은 대충 주식투자하고, 부동산 재테크를 하거나 자식 학군을 바꾸려고 대충 위장전입도 하고, 때때로 골프도 즐기는, 시쳇말로 잘 먹고 잘 사는 부류에 속하게 되었을까? 알 수 없다.

그분을 만났기 때문에 리영희 선생의 글이나 C. 라이트 밀즈의 〈들어라 양키들아〉를, 사르트르와 카뮈를 읽게 된 것일까? 전태일의 삶과 죽음에 관해 알게 된 것도 그분을 만난 인연 때문일까? 알 수 없다.

그분을 만나지 않았어도 리영희 선생의 글과 〈들어라 양키들아〉와 사르트르, 카뮈를 읽었을 수도 있고, 전태일을 알았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스무 살에 그분을 만난 게 30대 초반 프랑스 땅의 망명객으로 귀착되는 내 인생의 첫 변곡점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부역자 홍 씨의 대한민국

여섯 살, 세 살 나이에 한국을 떠난 두 자식이 다닌 프랑스 학교 교문마다 ‘자유·평등·박애’라고 적혀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상념에 젖던 것도 그분을 만난 인연과 무관하지 않다. 내가 그분을 만나지 않았고 망명객이 되지 않았다면 프랑스 학교 교문마다 청·백·홍 삼색기로 표현되는 프랑스 공화국의 국가 이념인 자유·평등·박애의 세 글자를 새겨 놓은 것을 눈여겨보지 않은 채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내가 그 세 글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아! 이들은 긍정적인 가치를 가르치는 구나”라고 한탄인지 탄복인지 알 수 없는 혼잣말을 하던 것은, 내가 다닌 초등학교 담에 큼직하게 적혀 있던 ‘반공·방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용산참사 문제해결을 촉구하는 1인 시위에 참여한 홍세화 공동대표
내가 다닌 학교에 민주공화국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헌법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면, 대한민국 공교육의 1차적 소명은 대한민국 국민을 민주공화국의 구성원으로 형성하는 일이다.

공교육의 현장인 학교마다 강조되어야 할 것은 민주공화국이어야 했다. 프랑스의 학교마다 그들의 국가 이념인 ‘자유·평등·박애’가 강조되듯이. 그러나 내가 다닌 학교에서 강조된 것은 민주공화국인 아니라 ‘반공·방첩’이었다.

나는 사람과 사회를 알기 전에 증오부터 배웠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은 휴전 이듬해인 1954년. 그때부터 범생에 속하던 나는 반공교육에도 범생이었다. 5.16 군사쿠데타가 났던 중학교 2학년 때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하고……”로 시작하는 ‘혁명공약’을 열심히 암기한 게 변소 청소 당번을 면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분을 만난 운명의 날까지 나는 ‘빨갱이는 색출해 제거해야 한다’는 정언명령에 추호의 의심도 갖지 않던, 프리모 레비가 말한 ‘평범한 사람’에 속했다. 20대에 유대인 수용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결국 만년에 자살을 선택한 〈이게 인간인가〉의 저자인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괴물들이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위험한 존재가 되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다.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평범한 인간들이다. 의문을 품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믿고, 행동하는 기계적인 인간들 말이다.”

그렇게 평범한 사람에 속하던 나는 스무 살에 충남의 어느 골 깊은 농촌에서 그분을 만났다. 성은 나와 같은 홍 씨였고, 항렬은 나보다 한참 위인 ‘유’ 자 돌림이었다. 그는 반공포로였다. 1950년 가을 어느 날, 인민군에 반은 강제로 지원했다가 곧바로 붙잡혀 포로수용소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얼마 뒤,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으로 풀려나 타박타박 고향으로 돌아왔다.

인간의 삶에 하염없이 겸손하기

그러나 돌아온 고향에 그의 가족은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부모와 아내 그리고 나이 어린 아들 둘까지 마을 청년들이 휘두른 몽둥이에 모두 타살되어 다른 희생자 80여 명과 함께 구덩이에 묻혔다. 부역자 가족이라는 이유였다.

혼자 남은 그는 가해자들이 사는 고향을 뜨지 못했고, 몇 년 뒤 새 장가를 들었다. 그는 가난했고, 가해자들은 괜찮게 살았다. “딸만 셋이여.” 아직도 귀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그의 촉촉한 목소리. 그 뒤 나는 그분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여러 해 전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프랑스에서 돌아온 뒤의 일이다. 만년에는 날이면 날마다 술로 보냈다고 했다.

사람은 잔인했고 질겼다. 죽이는 데에 잔인했고, 살아남는 데에 질겼다. 사상과 이념 따위가 다르다는 이유는 어쩌면 인간의 잔인성과 집단 광기를 숨기려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지 모른다. 단지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고, 집단 광기의 나락에 떨어질 수 있는 존재인가.

스무 살에 단 한 번밖에 만나지 못한 그분을 나는 상념 속에서는 수도 없이 만났다. 그분은 나에게 살아남은 것이 부채임을 끊임없이 확인시켜 준다. 그분은 내 삶의 처절한 교사다. 내가 사람에게 분노하는 대신 그런 사람을 낳는 사회에 분노한다면, 그래서 다른 사람과 싸우기보다는 그런 사람을 낳는 사회와 싸우고 나 자신과 싸우려고 애쓴다면, 그 속에 그분의 삶이 나에게 가르쳐준 바를 빼놓을 수 없다.

그분은 그의 삶을 통하여 나에게 무엇보다 인간의 삶에 하염없이 겸손할 것을 가르쳐주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죽는 그날까지.

홍세화 학벌없는사회 공동대표

홍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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