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까마귀가 과연 검은색일까-칼 포퍼(1)

철학여행까페[80]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9.09.21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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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6월 오스트리아 수도 비인에서 공산당이 이끄는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와 경찰이 격렬하게 충돌을 했다. 12명의 시위 참가자들이 경찰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비통한 심정을 누를 수가 없었다. 당 간부가 죽은 사람들에 대해 언급했다.

이동희
1919년 6월 15일 경찰과의 충돌로 한 사람이 다쳐 누워있다.
“희생자들은 미래에 도래할 필연적인 세계 혁명을 위해 죽은 것이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당 간부의 말에 수긍하는 태도였다. 그러나 한 소년은 그 말에 몸서리를 쳤다. 그 소년은 세계 혁명과 “필연적인 역사적 진보”에 대한 신념을 위해 인간의 희생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인간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 소년은 그 일을 계기로 공산주의와 결별하였다. 그리고 그 소년은 그때부터 역사는 불변의 법칙에 의해 규정되며 역사의 진행에 대한 예측은 가능하다고 하는 신념에 대해 불신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일찍부터 ‘역사주의’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했던 이 소년은 나중에 비판적 합리주의로 유명한 철학자가 된다. 그 소년의 이름은 칼 라이문트 포퍼(Karl R. Popper, 1902∼1994)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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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포퍼
칼 포퍼와 공산주의

칼 포퍼는 1902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유대교 신앙을 포기한 유대인이었다. 그는 빈 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사회개혁과 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집에 1만 여권의 책을 보유한 장서가였다. 포퍼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서재에서 플라톤, 베이컨, 데카르트 등의 철학 저서를 읽으며 자랐다.

그는 키가 작고 자의식이 무척 강했으며 호기심이 많았다. 그는 학생시절부터 맑스의 사상과 프로이트와 아들러의 정신분석이론에 열광했다. 그러나 그는 앞에서 언급한 1919년의 사건을 계기로, 그리고 그 해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강의를 들은 다음부터 지적인 방향을 달리했다.

아인슈타인은 1916년 3월 20일〈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에 상대성이론을 발표한다. 이 논문에서 그는 자신의 이론을 검증할 수 있는 세 가지 예들, 즉 수성의 근일점이 1세기에 43도 만큼 궤도상에서 돈다는 것, 빛이 중력장 속에서 휜다는 것, 중력장 속에서 빛의 적색 편이가 일어난다는 것을 제시했다. 수성의 근일점이 궤도상에서 돈다는 것은 이미 19세기 중반에 프랑스의 천문학자 르베리에(Urbain Jean Joseph Leverrier, 1811∼1877)가 관측했다. 따라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이 이 르베리에의 관측 결과와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빛이 강한 중력장을 지날 때 생기는 빛이 휘는 현상과 적색 편이는 아직 관측되지 않았다. 태양주변에서 빛이 휘는 현상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 개기일식 때 영국의 일식 관측대에 의해 처음으로 관측되었다.

아인슈타인은 포퍼에게 많은 영향과 영감을 주었다. 그는 아인슈타인이 맑스와 프로이트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할 때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주장한 가설을 절대적 진리로 선언하지 않고,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과학적 진리가 영구불변한 진리가 아니고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이후 포퍼 철학에 중요한 기틀이 된다.

청년 포퍼는 공산주의와는 입장을 달리했어도 사회적 참여와 포괄적인 사회개혁의 목적을 앞으로 자신이 수행해야 할 의무로 생각하였다. 그는 일용노동자로 일을 하는 동시에 교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기로 결심하였다. 1922∼1924년에는 가구공장의 견습생으로 일하였다. 목공 장인은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지 물어보라. 나는 모든 것을 안다”라고 포퍼에게 자주 말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포퍼는 그때 목공 장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포퍼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음악에도 관심이 많아 음악가가 되려고 빈 음악학교에 1년간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빈 대학에서 심리학과 철학을 공부하였고, 1928년에〈사유 심리학의 방법론 문제〉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30년 고등학교 교사로 임용되었고 결혼을 하였다. 당시에는 모리츠 슐리크(Moritz Schlick)와 루돌프 카르납(Rudolf Carnap)을 중심으로 한 빈 학파가 위세를 떨칠 때였다. 빈 학파가 관심을 둔 문제는 이런 것이었다. “어떻게 과학적 이론과 비과학적 이론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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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납
빈 학파와의 만남


포퍼는 대학 시절에 카르납의 세미나에 참여했었다. 그러나 그는 빈 학파에 속하지 않았다. 그는 빈 학파의 과학과 비과학을 가르는 기준으로 내세운 ‘검증가능성의 원리’를 비판하였다. 예를 들어 ‘까마귀가 까맣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모두’ 검사하여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구 곳곳의 까마귀를 다 찾아내야 하고, 미래의 까마귀까지 조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까마귀가 까맣다’라는 명제는 어떻게 일반적인 명제가 될 수 있는가? 세상의 모든 까마귀를 조사할 수도 없는데.

포퍼는 이 점에서‘검증가능성의 원리’ 대신에‘반증가능성의 원리’를 내세운다. ‘까마귀가 까맣다’라는 명제는 ‘하얀 까마귀’나 ‘노란까마귀’가 나오기 전까지 일반적인 과학적 명제로 용인된다. 그러나 ‘하얀 까마귀’나 ‘노란까마귀’가 나온다면, 그것은 오류로 증명된다.

그는 이렇게 과학적인가 아닌가 하는 기준을 그 이론의 반증 가능성, 즉 반박 가능성에 둔다. ‘사후 세계’에 대한 이론은 입증하거나 반증할 수도 없다. 우리가 죽어서 확인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학이 아닌 것이다.

포퍼의 반증 이론은 과학적 이론이 오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과학은 항상 이 오류 가능성을 제거함으로써 발전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포퍼가 볼 때 과학은 항구불변한 진리가 아니다.

포퍼는 이러한 주장을 〈탐구의 논리〉를 1935년에 출판했다. 빈 학파의 사람들은 이 책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주장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해결책을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고등학교 교사였던 그를 유명한 과학철학자로 만들었다. 아인슈타인도 이 책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이 책의 몇몇 오류만 제거한다면 ‘정말 훌륭한 책’이 될 것이라고 포퍼에게 이야기했다. 그는 1935∼1936년에 걸쳐 영국에 체류하였다. 그는 에이어, 이사야 벌린, 버트란트 러셀, 슈뢰딩거, 하이에크 등을 유명한 학자들과 만남을 가졌다.

포퍼는 1936년에 유럽 반대편의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 있는 캔터버리 대학의 철학과 강사 제안을 받는다. 이 시기는 이미 히틀러가 정권을 완전 장악해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가 고조되고 있었다. 결국 그는 나치 지배의 유럽을 떠나 뉴질랜드행을 선택했다. 1937년 1월에 그는 뉴질랜드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조용한 삶을 살면서 논리학과 과학이론의 확립에 관심을 집중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포퍼에게 정치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고, 정치 철학에 대한 책을 쓰게 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동희
포퍼의 부모
정치철학 입문 배경


1938년 3월 13일에 오스트리아는 독일 나치 제국에 병합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합병 이후 유대인들은 더욱 핍박을 받게 된다. 고향의 가족과 친지들 그리고 친구들은 포퍼에게 뉴질랜드로 갈 수 있는 허가서를 얻게 해 달라고 도움을 요청해 왔다.

그러나 뉴질랜드는 매우 엄격한 입국정책을 고수했다. 망명자들을 포용하는 정책이 없었다. 그는 도움을 주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유대 망명자 위원회’를 설립해 관료들을 끊임없이 설득했다. 그 결과 약 36가구 가족들이 뉴질랜드에 입국할 수 있었다. 나치가 12월 유대인 학살을 벌인 이후에야 뉴질랜드 정부는 유대인들에게 비자를 발급해 주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러한 조치도 더 이상 쓸모가 없었다. 포퍼의 어머니는 1938년 빈에서 사망하였고, 아직 살아 있던 그의 누이는 프랑스를 거쳐 겨우 스위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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