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홧발 아래서 배운 민주주의

[내 인생의 첫 수업] 이학영l승인2009.09.28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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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가을 막 스무 살이 되던 시절. 시절이 가난했음에도 나는 그런대로 안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찌어찌하여 생각지도 못한 대학생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공부만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생 농촌에서만 살아온 촌뜨기가 낯선 도시에 나와 세끼 밥 먹는 것도, 환한 도시의 거리에 적응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억지로 하던 공부로부터 해방된 것도 너무나 좋았다.

고등학교 때까지 나를 짓눌렀던 각종 외우기 시험, 수학의 미분적분, 순열, 조합, 화학의 원소주기율과 이해할 수 없는 분자식 등…. 대학은 그런 것들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주었다. 끊임없이 외워야하는 공부에 진력이 나던 터였는데 대학에 와서는 그런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영어 공부만 빼고는 딱히 공부한다는 기분이 별로 들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했기 때문에 공부라기보다는 그저 이야기책 읽는 기분으로 교과서를 읽으면 되었다. 그리고 시험도 대부분 객관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부해서 이해하는 만큼만 답안을 작성해도 그런대로 성적을 얻을 수 있었다.

첫 여름방학을 맞아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는 만큼 잔뜩 책을 빌려서 고향으로 내려갔다. 세계문학전집류, 서양사, 동양사 등 내가 알지 못하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책 속에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속에 빠져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당시 막 이름을 날리던 이청준의 단편들, <현대시학>이나 <문학과 지성> 등에 실린 많은 시와 소설들, 신석정 시인의 고독하면서도 은은한 서정 시편들, 헤르만 헷세의 아름다운 방랑과 고독한 소설들.

그리고 방대한 서양사를 읽으며 가볼 수 없는 유럽의 많은 나라들에 대한 상상을 펼쳤다. 비록 빈한한 농촌마을 한가운데서 보내는 방학이었지만 두 달이나 되는 길고 긴 대학의 방학은 그 이전까지 내 인생에서 누리지 못하던 참으로 행복한 휴가였다. 온 가족들이 하루라도 들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골 형편 속에서도 나는 은근히 나만의 특권을 누리고 살고 있었다. 농촌 풍경을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면서 헤르만 헷세라도 되는 느낌으로 스무 살의 청춘을 맞고 있었다.

대학도서관을 둘러싼 군인들

1학년 여름방학을 마치고 돌아간 대학은 조금 어수선했다. 그해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교련반대 학생운동이 시작되었다. 신학기인데도 쉬는 시간이면 누군가 강의실 앞에 나와서 왜 교련을 반대해야 하는가를 역설하곤 하였다. 내가 입학하던 그때는 대학에 교련과목이 신설되었고 정규과목으로 군사훈련을 받아야 하던 때였다.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나는 쉬는 시간이면 맨 뒷자리에 앉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교련반대 데모가 심심치 않게 벌어졌지만 나는 그냥 멀리 피해 다녔다. 행여 그 가까이 지나가다가 잘못될까 두려웠고 혹시 졸업 이후에 공무원 등으로 취직하는데 좋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주말이면 새로 가입한 전공 공부서클의 동료들, 교수님과 공부하면서 인근 산으로, 들로 돌아다녔다. 우선 공부하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다른 생각은 별로 없었다. 열심히 공부하다가 졸업하면 교사가 되거나 공무원이 되어서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부양하면서, 그리고 무언가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행복한 삶을 살리라 생각했었다. 미래는 푸른 봄날 같았다. 비록 검은 작업복을 입고 다니는 시절이었지만 꿈꾸는 세상은 아름다웠고 그 안에 살아갈 내 미래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교정의 너른 숲에 노랗고 붉은 단풍이 물들던 참 아름다운 가을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술렁술렁하더니 밖으로 나갔다. 나도 따라서 나가보았다. 군인들이 대학에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던 때였다. 아닌 게 아니라 멀리 정문 쪽에 한 무리의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햇빛에 반사된 모자를 쓴 채 도열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정말 군인들이었다.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 군인들에 대한 분위기는 별로였다. 대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강요하는 것에 모두들 체질적으로 거부반응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대학의 자유, 대학생들의 비판정신을 짓누르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군인이 대학에 들어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순진한 생각이었지만 대학은 학문의 전당이요, 자유의 전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군인들이 대학생들의 교련반대시위를 겁주어 위축시키는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한 무리의 학생들이 서있는 대학본부 쪽으로 내려가 보았다. 방송 소리가 들렸다. 그날 오후 몇 시쯤이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정해진 시간까지 모두 해산하라는 확성기 소리였다. 그렇지 않으면 교정으로 진입해서 해산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본부 앞에는 학생들도 많지 않았다. 모두들 그저 사태가 어떻게 되나 궁금해서 쳐다볼 뿐 격렬하게 항의하는 학생들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정말 군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예고한 시간이 되자 서서히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내 안에 알 수 없는 황당함과 분노와 두려움이 겹쳐왔다. 설마 했는데 설마가 아니었다. 뭉쳐있던 학생들이 교정 여기저기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일부 학생들은 군인들을 향해 분노와 야유를 던졌다.

일단 잡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나는 무조건 도서관 쪽으로 달려갔다. 도서관이면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도서관 창문에 붙어서 밖에서 일어난 일들을 지켜보았다. 그런 와중에도 많은 학생들은 밖에서 일어난 일과는 상관없이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각 건물을 훑어서 도서관 쪽으로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언덕 위에 서있는 도서관 둘레를 모두 둘러쌌다. 그제서야 놀란 학생들은 모두 창문에 붙어서 사태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일부학생들은 군인들이 도서관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출입문 쪽으로 책걸상을 밀어붙여 바리케이트를 쌓았다.

또다시 확성기 소리가 들려왔다. 도서관에 있는 학생들은 모두 밖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안 나오면 최루탄을 쏘겠다는 거였다. 조금 있다가는 여학생들만 먼저 나오라고 하기도 했다.

한 마리 포박된 짐승이 되어

그때, 갑자기 한 여학생이 책상 위로 올라갔다. 내가 다니던 국문과 선배 여학생이었다. 평소 차분하게 공부만 열심히 하던 선배였는데…. 그 선배는 책상 위에 올라서더니 즉석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여학생 여러분, 안됩니다. 우리 여학생들이 나가면 여기 남아있는 남학생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도 함께 남아서 남학생들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훗날 나는 그 선배를 생각하면 잔 다르크를 떠올리곤 한다. 그때 그 상황에서 나에게 그녀는 잔 다르크 이상 용감한 여성이었다. 그러니 도서관에서 누구하나 그냥 나가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당황하고 겁나는 얼굴이었지만 ‘설마 대학에서 가장 신성한 도서관에 최루탄을 쏘겠는가’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또 설마였다. 펑펑 유리창을 뚫고 최루탄이 날아 들어왔다. 학생들은 모두 책상 밑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최루탄 연기가 퍼지기 시작하자 눈물 콧물에 숨이 막혀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학생들이 하나 둘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빛나는 그날 도서관 앞의 햇살을 나는 잊지 못한다. 밖으로 나서자 환한 햇살아래 군인들이 서있었다. 학생들 하나하나를 발길질하며 무릎을 꿇리고 손은 뒤로 얹은 채 땅바닥에 개처럼 머리를 처박도록 했다. 한 마리 포박된 짐승이었다. 우리는 사로잡힌 짐승들이었다. 개였다. 아, 그때 꿇어 박혀 가랑이 사이로 내다보이는 교수님들의 얼굴이 보였다. 형언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슬픔이 몰려왔다.

그날 밤 우리는 경찰서에 끌려가 내내 큰소리와 야유와 주먹질 속에서 조사를 받아야 했다. 세상에 나와 처음 겪는 일이었다. 나를 지켜준다고 믿었던 군인과 경찰이 어떻게 나를 짓밟는지, 국가권력이라는 것이 힘없는 국민을 짓밟게 되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배우게 된 첫 수업이었다.

그날 새벽 풀려나와 내 작은 자취방에 돌아와 펑펑 울었다.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울었다. 내가 한갓 군홧발에도 자근자근 짓밟힐 수 있는 나약하고 하찮은 존재라는 것이 너무 슬퍼서, 그 비참함에 울었다. 나라란 나를 지켜준다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배운 첫 수업이었다. 정부도 군대도 경찰도 나를 짓밟는 무서운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배운 거였다.

그날 밤 나는 다짐하였다. 권력이 부당하게 국민을 짓밟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고. 그 새벽 나는 처음으로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 첫 수업으로 인해 헤르만 헷세처럼 낭만적으로 살고자 하던 내 인생이 송두리째 바꿔지리라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 이후 오늘까지 사람이 온전하게 대우받는 세상을 향한 미완의 꿈은 오늘도 내가 살아가는 중요한 존재 이유이다.


이학영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

이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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