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형제 막내의 어머니 전 상서

[내 인생의 첫 수업] 정청래l승인2009.10.14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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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래야, 밥은 꼭꼭 챙겨 먹어라.”

서울구치소 1시간 특별면회 중 50분이 넘게 내 손을 꼭 잡고 우시다가 마지막으로 건넨 어머니의 말씀이었다. 10남매의 10번째 막내아들이 서울에서 아무 탈 없이 공부만 하는 줄 아셨던 어머니셨다. 열여섯 살에 시집와 열여덟에 첫 아이를 낳고, 마흔 다섯에 낳은 늦둥이 막내가 감옥에 갔다니 얼마나 놀라셨을까….

어머니가 1991년 10월 13일 미국 대사관저 점거 농성사건으로 구속된 막내의 소식을 들은 것은 사건이 난지 석 달 후의 일이었다. 전경의 방패에 찍혀 10바늘이나 꿰매고 붕대를 감은 모습이 9시 뉴스 톱기사로 나오시는 것을 보지 못하셨다. 형수님이 시골에 내려가 뉴스시간마다 TV를 껐다고 했다. 그러나 추석에도 설날에도 집에 오지 않는 막내에 대한 궁금증이 결국 형수님의 입을 열게 만들었다.

청천벽력이었으리라. 다음날 부랴부랴 구치소에 면회를 오신 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내 무릎에 고개를 묻고 우시기만 했다. 입회한 교도관의 눈에도 눈물이 맺힐 정도로 나와 어머니는 그저 소리 내어 울기만 했다. 그리곤 그 한마디 말씀만 하시고 구치소 보안과 앞마당을 비척비척 나가셨다. 어머니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으셨다. 그저 앙상한 어깨를 들썩이며 그렇게 앞만 보고 걸으셨다.

아들 구속에 쓰러진 어머니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어머니가 정상적으로 두 발에 의지해 걷는 것을 본 것이. 서울 구치소 보안과 앞마당의 걸음걸이가 내가 본 어머니의 건강한 직립보행의 마지막이었다.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목포교도소로 이감을 가면서 남도지방에 줄지어 서있는 대나무 숲이 그리도 슬픈 형상인줄 미처 몰랐다. 대나무의 곧은 기상만 생각했던 나는 텅 비어 있는 대나무 속의 슬픔의 곡절을 그 때까지 몰랐다.

“청래야 미안하다. 형은 네가 출소하면 식을 올리려했는데 네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가 어렵게 되었다. 참석은 못하지만 하객들께 보낸 결혼식 청첩장을 보낸다. 그리고 안 좋은 소식이 하나 있다. 너무 놀라지 마라. 어머니가 못 걸으신다. 그런데 자꾸 걷게 해달라고 하시는구나.”

나의 구속으로 어머니가 느꼈을 청천벽력 같은 놀라움과 슬픔이 내 가슴에도 파도가 되어 거세게 요동쳤다. 나보다 네 살이 많은 형님의 결혼식을 못 가보는 것도 그렇지만 어머니의 비보는 나를 패닉 상태로 몰아갔다. 서울구치소 면회를 다녀가시고 시름시름 앓다가 도라지 밭에서 쓰러지신 후 어머니는 끝내 일어서지 못하셨다.

그래도 징역체질이라며 너스레를 떨며 ‘옥중투쟁위원장’이란 타이틀까지 거머쥐고 감옥소 생활을 하던 나였다. 네 발짝을 걸으면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1.04평 독방에서도 나름대로 바쁜 일정을 보내던 활기찬 생활이 그 뒤로 180도 바뀌기 시작했다. 걸을 수 있음에도 걸을 수 없는 아들과 걷고 싶어도 걸을 수 없는 어머니….

창살 밖 쥐새끼들과 대화하고 24시간 중 1시간 허용된 운동시간에 담장 밑 구석에 핀 민들레와 사귀어 오던 취미생활도 시들해졌다. 23시간을 갇혀서 사는 나와 24시간을 갇혀서 사시는 어머니의 쓸쓸한 데이트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1988년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통일운동의 물결에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조국통일특별위원장을 맡아 출범식을 할 때도 어머니를 목 놓아 외쳤건만 이처럼 애절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제 스물세 번째 생일입니다. 저는 이 시간부터 수배자가 됩니다. 저를 열 번째로 낳은 어머님께 조통특위 발족식을 알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를 낳아준 어머니보다 더 큰 어머니께 효도하려 이 자리에 섰습니다. 시골에 계신 저희 어머니도 이 막내의 효심을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순전히 나의 자의적 해석과 판단이었다. 내가 대학교 총학생회 사무실에서 기숙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경찰은 시골마을에 나를 잡으러 다녔다.

경찰이 수갑을 들고 시골마을에 다녀간 날은 술에 잔뜩 취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부싸움을 하는 날이었다. “자네 막내는 이제 끝이야. 취직이나 제대로 하겠어?” 이런저런 수군거림을 듣고 온 아버지는 그 분풀이를 어머니께 하셨다. 그래도 경찰에게 잘 보이면 자식이 좀 나아질까 해서 경찰들에게 막걸리를 대접한 어머니의 착한 마음도 몇 시간 안 되어 무너져 내렸으리라. 이때는 꿋꿋하게 버텨내시던 어머니가 아들의 두 번째 감옥살이에는 다리의 힘이 무너져 내리신 것이다.

“밥 챙겨먹고 다닐게요”

앞서 첫 징역을 살고 나왔을 때 인천에 살던 누나의 집 현관을 들어서기 전에 두부를 잔뜩 입에 안겨 주시던 그 건강했던 어머니가 쓰러지신 것이다. “앞장서지 말고 중간에 서라”는 어머니의 신신당부를 나는 지키지 못했다. 아니, 인위적으로 지키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다.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도 있지만 더 큰 어머니인 조국에 대한 가치 또한 소중했던 것이다. 그러나 가치를 따지기 이전에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의 깊이를 그때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어머니는 내가 만기출소를 한 뒤에도 3년을 그렇게 병석에 누워계시다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서울에서 2주에 한 번씩 고향 대전에 내려가 대소변 냄새 그득한 쓸쓸한 어머니 독방에서 함께 자면서 어머니와의 이별을 예감해야 했다. 내가 내려가면 며느리도 손녀딸도 아무도 방에 못 들어오게 했다. 어머니는 몸 구석구석 닦아주는 막내에게 몸을 맡기시고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시곤 했다.

“아이고~ 막내야! 어미가 너에게 미안한 것이 있다. 중학교 때 그렇게 공부하려고 애쓰는 너에게 일을 안 시키고 공부를 시켰어야 했는디. 그랬으면 더 출세했을 텐데…… 그때는 어쩌자고 그렇게 일만 시켰는지 모르겠다. 미안하다.” 이것이 어머니가 전해준 마지막 말이 될 줄을 몰랐다. 3일 후에 어머니는 의식을 잃고 말씀을 못하셨다.

“어머니, 막둥이 청래 왔어요. 눈 한번 떠 보세요.” 큰 형님의 그 말을 들으셨던 것일까. 어머니는 천근같이 무거운 눈꺼풀을 마지막 안간힘을 쓰며 밀어 올리고 나를 쳐다보시는 도중에 운명하셨다. 내 눈물이 어머니 눈에 떨어졌다. 내 손으로 어머니의 눈을 감겨드리자 어머니는 그제 서야 눈을 감으셨다. 나중에 국회의원이 되어 고향에 갔을 때 동네어르신들이 찾아와 내 볼을 부비며 우셨다. “네 어머니가 이 좋은 소식을 아실랑가 모르겠다.”

그러나 어머니, 걱정 마세요. 저는 저의 마음속 좌표이자 스승인 어머니와의 데이트를 중단하지 않았으니까요. 아침저녁으로 제 방에 걸린 사진 속 어머니는 그대로 계시잖아요. “막내야 술 적게 먹고 밥 많이 먹어라. 정직하게 살고 진실하게 살아라.” 어머니는 오늘도 저한테 말씀하시잖아요. 어머니, 건강 챙기며 잘 살겠습니다. 걱정하지마세요.



정청래 전 국회의원

정청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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