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철학자, 정신병원을 연구하다

철학여행까페[82]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9.10.14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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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고등사범은 국가 엘리트를 키우는 학교였다. 경쟁과 긴장으로 학생들은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심했다. 한 학생이 교실 바닥에 누워 면도칼로 가슴을 그으려고 했다. 그때 한 선생이 다가 와 그를 말렸다. 이 학생은 밤새도록 손에 칼을 들고 한 친구를 쫓아다닌 적도 있었다.

이동희
푸코
1948년에 이 학생은 다시 자살을 기도했다. 동급생들은 이 학생이 거의 미쳤다고 생각했다. 동급생들은 그가 왜 그런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하루는 한 친구가 이 학생에게 어디 가냐고 물었다. 그때 이 학생은 태연하게 이렇게 말을 했다.

“목을 맬 줄을 사러 할인점에 간다.”

이 학생은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는 동성연애자들 바에 갔다 온 날이면 수치심과 후회로 괴로워하다 탈진 상태가 되곤 했다. 고등사범에 입학한 지 2년이 되던 해 그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정신병원인 생트-안느 병원에 갔다.

지극히 명민한 이 학생은 정신 병원에 입원해서 오히려 정신과 의사들과 정신병동을 관찰했다. 얼마 지나지 이 학생은 정신병동의 인턴이 되어 정신과 의사들과 함께 일을 하기 시작했다.

광기의 연구자 미셀 푸코

자살을 기도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이 학생은 정신병동의 역사와 광기의 연구로 유명한 철학자 푸코(Michel Foucaut, 1926~1984)였다. 푸코가 학생이던 1950년대 동성연애는 일종의 정신병이거나 ‘불법’ 또는 수치스러운 행위였다. 물론 지금까지도 그러한 분위기는 없어지지는 않았다.

푸코는 에이즈로 사망한 동성애자였다. 그는 여러 종류의 마약을 상용했다. 사도-마조히즘적인 성적행동을 실행하기도 했다. 그는 재규어 자동차를 몰며 속도를 즐긴 속도광이기도 했다. 그는 도덕교사 같은 철학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단 한권도 전통적인 주제의 철학 책을 쓰지 않았다. 그가 쓴 <임상의학의 탄생>, <광기의 역사>,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등은 심리학 또는 역사학으로 분류될 수 있는 책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광기를 넘나드는 푸코를 철학자로 부를 수 있을까? 들뢰즈는 푸코를 이렇게 평가한다.

“푸코는 가장 완전한, 아마도 유일한 20세기의 철학자이다.”

들뢰즈가 20세기의 철학자로 불렀던 푸코는 어떠한 사람인가? 폴-미셀 푸코는 프랑스의 지방도시 푸아티에에서 외과의사의 아들로 1926년에 태어났다. 푸코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외과의사였다.

푸코의 아버지는 아들도 의사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들은 열일곱살 때 결코 의사가 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푸코는 4살에 앙리4세 고교 유치부에 들어갔다. 학교에 가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누나와 떨어지기 싫어 떼를 썼기 때문이다.

그의 나이 열세살 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그때 그는 생-스타니슬라스 학교의 학생이었다. 독일군이 곧 푸아티에를 점령됐다. 푸코는 학교 난방을 위해 동기들과 함께 독일군 부대에서 장작을 훔쳐오기도 했다.

전쟁으로 인해 저항하던 몇몇 교사들이 체포되었다. 1942년부터 그는 철학공부를 위한 개인 교습을 받았다. 그는 베르그송, 플라톤, 데카르트, 스피노자와 칸트의 책을 읽었다. 그는 아버지가 기대했던 의학공부가 아니라 철학공부를 하기로 결심을 한다.

푸코는 푸아티에 고교를 떠나 파리의 명문 고등사범(Ecole Normale Superieure)에 입학준비를 위해 파리의 앙리4세 고교로 전학을 갔다. 이 학교 철학교사는 쟝 이폴리트였다. 그는 쟝 이폴리트의 헤겔 해석에 매료되었다.

1946년 7월 입학시험에서 그는 4등으로 합격했다. 그는 고등사법에서 메를로 퐁티 등 여러 유명한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그러나 푸코의 대학시절은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그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 때문에 좌절했고 우울증 중세를 보였다. 푸코는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마침내 자살을 시도했다.

이동희
18살 때의 푸코
<광기의 역사>를 쓰다


앞서 기술한데로 푸코는 생트-안느 정신병원에 입원해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그는 동성애에 대한 성적 관심을 털어놓았다. 당시만 해도 정신과 의사들은 동성애를 심각한 질병으로 취급했다.

정신과 의사들은 푸코의 우울증을 치료하지 못했다. 대신 푸코는 정신병원에 있으면서 정신병원 자체를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다. 푸코는 정신과 의사들이 단순한 치료하는 일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역할을 한다고 느꼈다.

그는 정신과 의사들이 무엇을 해야 되는지, 해서는 안 되는지를 결정하는 그런 ‘정신적 경찰관’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때의 느낌은 앞으로 그의 연구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49년에 그는 심리학 교사 자격증을, 1950년에는 철학교사 자격증을 획득했다. 푸코는 파리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1950년 프랑스 공산당(PCF)에 가입했다. 전후 프랑스 전역에 격렬한 파업의 물결이 몰아닥쳤다.

프랑스의 대다수 지식인들은 노동자의 편에 섰다. 공산당은 그런 기세를 등에 업고 25%대의 지지를 얻을 정도로 유력한 정당이었다. 하지만 푸코는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1953년 공산당을 떠났다. 관료화, 제국주의화되어가는 소련에 대해 푸코와 같은 많은 프랑스 지식인들이 등을 돌렸다.

1951년부터 푸코는 에콜에서 심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데리다가 이 강의를 수강했다. 푸코는 학생들을 파리의 정신병원에 데리고 가 환자들을 직접 보여주었고, 의사의 치료 과정에 대해 견학을 시켰다. 이 과정을 통해 푸코는 정신분석학에 더욱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1952년에 파리 소재 심리학 기관으로부터 심리-병리학 학위를 수여받았다. 릴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가르쳤고, 들뢰즈를 처음 만났다.

1955년 프랑스 생활에 염증을 느끼던 푸코는 ‘자유’를 느끼기 위해 스웨덴으로 떠났다. 그는 스웨덴의 웁살라 대학교에서 프랑스문화와 언어를 가르쳤다. 거기서 그는 16세기에서 20세기 사이의 의학 자료들을 모아 놓은 거대한 도서관을 접하게 된다. 그는 몇 년 간 이 도서관에 살다시피 하면서 연구를 했다. 이때에 그는 <광기의 역사>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이후 1960년까지 폴란드 바르샤바와 독일 함부르크의 프랑스 센터 원장을 지냈다. 1960년 프랑스로 되돌아온 그는 클레르몽-페랑 대학에서 철학과 심리학을 가르쳤다. 1961년에 그는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역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도교수는 이폴리트였다. 이 박사학위논문은 <광기의 역사>로 출간되어 많은 호평과 동시에 악평을 받았다.

<광기의 역사>는 고전주의 시대에 광기를 둘러싸고 실제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푸코는 ‘광기’의 개념이 형성되고 유포된 과정을 고고학적 방법으로 추적했다. <광기의 역사>에는 유명한 상징이 된 ‘바보들의 배’ 이야기가 등장한다. 바보들의 배는 광인들을 태우고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돌아다니던 배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광인들은 도시에서 내쫓겨 상인이나 선원들에 이끌려 가다가 원래 살던 도시의 정화를 위해 내버려졌다. 17세기가 되자 도시에서 추방되어 어느 정도 자유로운 존재로 내팽개쳐 졌던 광인들은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광기와 대비되는 이성주의

르네상스 시대에 광기는 일상적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한 부분으로 이해되었다. 17∼18세기 고전주의 시대에 들어 광인들은 구치소에 수감되었고, 광기는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광기는 인간 이성에 정반대인 것으로, 또는 도덕적 틀을 위반하는 것으로 ‘철창’ 속에 갇히게 되었다.

이동희
푸코, 바보들의 배

이제 구치소에는 광인뿐만 아니라 게으름과 나태로 도덕적 일탈을 한 사람들, 즉 가난한 사람, 실업자, 성범죄자, 종교적 신성모독 죄인 그리고 자유사상가까지 수감되었다. 18세기 후반에 가서야 광기는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질병으로 이해된다.

‘질병환자’로 이해된 광인은 구치소에서 해방 되었으나 내적으로 더욱 정교하고 엄격한 처벌 기제인 ‘정신 치료’를 받아야 한다. 정신 치료를 받으면서 그들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기존 부르주아 사회의 엄격한 도덕 규칙을 따르도록 강제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처벌을 받게 된다.

이처럼 푸코는 광기의 역사를 추적해 감으로써 광기와 대비되는 이성주의의 '차별과 배제의 논리'를 역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그는 어째서 이성은 비이성을 질병으로 치부하고, 감금하고 억압하고 마침내 침묵 속에 가두었을까하는 물음을 던진다. 그는 광기의 역사를 탐구해 이성의 독단에 대한 강력한 경고와 이성의 '타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켰다.
<다음호에 계속>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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