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길로 이끈 총학생회장 낙선

[내인생의 첫수업] 이장희l승인2009.10.19 12:01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나의 인생행로를 바꾸는 데 가장 결정적 영향을 준 사건을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사건은 1971년 6월 18일 밤,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투·개표가 있은 서관 대강당에서 일어났다.

사건의 전모는 이러하다. 내가 1969년 3월에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입학하였을 당시 대학가는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 반대데모 열기로 후끈 달아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박정희 대통령은 1961년 5.16군사혁명으로 장면총리를 중심으로 하는 민주당 정부를 퇴진시키고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혁명 후 즉시 군대로 복귀한다는 민정이양이라는 국민과의 약속을 깨고 군복을 벗고 민간인 신분으로 대통령에 출마해 정권을 장악했다.

박 대통령이 선 건설 후 통일 기치를 내걸고 반공을 국시로 삼아 조국의 근대화에 온 힘을 다한 지도자인 것만은 분명하다. 포항제철과 경북고속도로 건설, 월남파병, 새마을운동 등으로 한국의 산업화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다른 한편 그가 인혁당사건(1964년 8월 14일 당시 중앙정보부가 41명의 혁신계 인사와 언론인·교수·학생 등이 인민혁명당을 결성하여 국가전복을 도모했다고 발표한 사건) 등에서 무고한 사람을 반공법 위반으로 사형에 처한 것은 인권침해의 대표적 사례였다.

그런데 당시 헌법상(1962년 12월 개정된 제3공화국 헌법) 대통령은 ‘대통령의 임기는 4년이고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라고 되어있어 1970년 12월에 그의 임기가 끝나게 되어 있었다. 당시 정치권은 대망의 70년대를 앞두고 1968년 겨울부터 70년대 전반기의 국가안보와 계속적인 경제건설의 추진 등을 위해 박 대통령에게 3선의 기회를 주려는 개헌문제가 널리 그리고 심각하게 논의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3선 임기연장을 위한 헌법 개정이 불가피했다.

야당과 재야민주화세력 그리고 정의감에 불타는 대학생들은 3선 개헌이 대만의 장개석 총통처럼 장기집권의 길을 만들어 주어 궁극에는 한국 민주주의의 심각한 퇴행을 가져온다고 크게 우려해 극구 반대했다. 특히 법과대생들은 밤을 새워 수 일간 많은 토론을 하였다. 결과는 모두 3선 개헌 반대데모였다. 3선 개헌안은 그해 1969년 9월 14일 새벽 여당의원들의 단독 날치기로 국회 제3별관에서 통과되었다. 그 개정조항이 바로 헌법 제69조 3항의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한다’이다.

법과대학 학생회에 관여하던 나는 이 문제에 깊이 개입되었다. 생활비와 학자금을 아르바이트에만 의존해 해결하던 나는 데모로 인해 나의 아르바이트에 미칠 악영향을 생각하며 많은 고민을 했다.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 생각을 하면 데모보다는 도서관에서 고등고시를 공부하는 것이 효도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피 끓는 젊은이들이 그렇듯이 나도 사회모순에 대해서 정의감이 강했고 입신출세보다는 나라의 먼 장래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보았다.

3선 개선에 반대하며 출마

사회문제에 대한 남다른 특이한 발언과 평소의 생활태도 때문에 친구들은 내가 시국문제에 대단한 전문가인 것으로 잘못알고 2학년 때 나를 법학과 학회장으로 선출했다.

1971년 3학년이 된 나는 시국집회 때마다 열변을 토하던 연설 때문에 졸지에 학과와 학내 동아리의 추천으로 총학생회장 후보로 추천, 옹립되었다. 선거이슈는 역시 3선 개헌문제와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연장 저지에 대한 대학인의 입장이었다. 선거기간은 4월부터 6월 18일까지였고, 선거방법은 단과대학 대의원에 의한 간접선거였다.

총학생회장 선거일은 1971년 6월 18일이었다. 단과대학 대의원을 뽑는 간접선거인지라 대학별 합종연횡·연합이 선거에서 중요했다. 나의 참모들은 주로 법과대 과 친구들인데 고지식하고 성실한 친구들이라 정치인처럼 합종연횡을 할 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과대 친구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열심히 선거운동을 했다.

드디어 투표일 날. 나의 장점은 타 후보 보다 열정적인 강한 현장스피치였다. 성실한 나의 참모들은 당일 나의 열정적인 스피치가 유동표를 완전 흡수할 것이라고 태산같이 믿었다. 그런데 후보연설을 하기 위해 연단 위에 올라 말문을 여니 목이 꽉 잠겨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나도 순간 매우 당황했다. 아무리 목에 힘을 주어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나의 연설은 대의원들에게 선명하게 전달되지 못해 투표장의 유동표를 흡수하는데 완전 실패했다.

더 신기한 것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연설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1차 투표 때 3명 후보 가운데 내가 1위를 했다는 사실이다. 2차 투표 시 1·2위가 결선투표를 했는데, 나는 그만 단 한 표차이로 2위에 머무르고 말았다.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낙선하고 만 것이다. 아무도 믿지 않는 사실이 일어났다. 당시 나는 물론이고 나의 참모들은 매우 당황하고 허탈했다. 학생처장님이 나를 위로한다고 개표 후 무조건 나를 자기 차에 태우고 고려대학교 대운동장을 몇 바퀴 돌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학생처장님은 “이장희 군, 총학생회장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야. 자네는 이제부터 공부에 전념하게”를 수십 번 반복하셨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1971년 10월 위수령선포와 함께 학교에 진입한 군인들은 총학생회 회의실에 들이닥쳐 총학생회장을 비롯해 학생들을 체포해 데려가서 숱한 고문을 했다고 한다. 그 중에는 검찰에 고발당해 실형을 산 학생들도 있었다. 물론 당시 나와 한 표 차이로 당선된 총학생회장도 군 정보기관에 끌려가 숱한 고생을 하였고, 대학생활을 정상적으로 마치지 못해 사회진출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런 후일담을 들으면서 지금도 나는 ‘선거당일 연단에서 왜 내 목소리가 별안간 잠겼을까’하고 많은 의문을 갖는다. 당시에는 무척 안타까웠지만 총학생회장선거에서의 낙선으로 나는 학문의 길로 인생의 방향을 틀었다. 특히 운동경력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해도 임용이 가능하겠느냐는 생각이 나를 대학원 진학과 학문의 길로 접어들게 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할까.

인생은 정말 ‘새옹지마’였다

물론 그 후 나도 1972년 10월 유신 시 긴급조치 위반으로 국가기관에 체포되어 끌려가 수 개월 고생을 하다가 졸업식 수 일 전에 석방되는 곤욕을 치렀다. 겨우 졸업식 전날 출소하여 고향 부모님께도 알리지 않고 친구 한 명만 참석한 쓸쓸한 졸업식을 맞이했다.

만일 1971년 6월 18일 ‘내가 명연설을 해서 대의원 유동표를 2표 이상 획득했다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하고 다시 생각해본다. 어느 선택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날 내 목이 별안간 쉬어 학생회장 선거에 낙선을 한 것이 나의 인생을 크게 바꾼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학생들에게 말한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지금은 힘들고 불행한 일인 것처럼 보여도 인생 전체를 보았을 때는 인생을 또 다른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사건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라고. 그래서 지금은 안 좋은 일처럼 보여도 낙심하지 말고 현재하고 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하라고 나는 젊은이들에게 충고한다.


이장희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장희  

<저작권자 © 시민사회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장희의 다른기사 보기

인기기사


여백
시민사회신문 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08288 서울특별시 구로구 새말로 93, 신도림태영타운상가2동 B105  |  대표전화 : 02-3143-4161  |  팩스 : 02-6737-1115  |   ingopress@ingopress.com
등록번호 : 서울 다 10706  |  등록일자 : 2013년 8월 26일  |  회장·논설주간 : 강상헌  |  발행·편집인 : 설동본  |  편집국장 : 양병철
후원계좌 : 국민은행 7788-01-04-375819 (시민사회신문)  |  청소년보호책임자 : 설동본
Copyright © 2007 시민사회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