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사기꾼인가 신철학의 등장인가-데리다[1]

철학여행까페[84]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9.10.26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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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쟈크 데리다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고자 했다. 그러나 캠브리지 대학의 몇몇 원로 멤버들, 베리 스미스, 콰인, 데빗 암스트롱, 르네 톰 등 특히 분석철학적 성향의 철학자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그들은 데리다의 철학이 학문적 명석함과 엄격함을 결여한 채 허풍과 애매한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콰인은 그를 사이비 철학자이자 소피스트라고 비난했다.

이전부터 데리다는 영미철학자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1977년에 그는 J. L. 오스틴의 화행철학과 관련해 존 R. 설과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에서 설은 데리다가 오스틴의 화행론을 잘못 읽었다고 논박했다.

이동희
데리다
데리다는 사이비 소피스트?


데리다가 오스틴이 논증을 하면서 사용했던 은유, 비유, 가벼운 말투 등을 가지고 말장난을 하면서 오스틴의 명백한 의도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데리다는 설의 논박에 대한 답변인 <유한책임회사>를 썼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는 설의 반박을 통째로 인용하면서 데리다 특유의, 정교한 말장난처럼 보이는 텍스트 해석을 시도하였다.

설과 설의 입장에 동조하는 영미철학자들은 또다시 데리다가 가당치 않은 술책을 부린 것으로 여겼다. 이 논쟁은 영미 철학자들 사이에 데리다의 저작에 대한 강한 거부감 또는 적개심에 불을 댕기는 계기가 되었다.

명예박사 학위 수여 문제는 결국 투표에 부쳐졌다.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는 문제로 투표를 하는 것은 29년 만에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다. 투표는 336대 204로 데리다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투표가 끝났어도 데리다에 대한 찬반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찬반논란은 그가 죽고 나서도 이어졌다. 그가 사망했을 때 영국의 <가디언> 기사는 그에게 존경심을 표한 반면, <뉴욕타임즈>는 4천명이나 되는 서명자들의 항의를 받을 정도로 그에 대한 신랄한 기사를 내보냈다.

그렇다면 데리다는 정말로 지적 사기꾼인가? 아니면 새로운 철학의 등장을 알리는 철학자인가?

데리다는 1930년 알제리의 엘 비아에서 중하위 계층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한 뒤 프랑스령 알제리도 나치 독일의 영향력에 들어간다. 독일의 괴뢰정권인 비시 정권에 의해 알제리에서도 나치의 유대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유대인에게 할당된 학교 배정인원 몫이 7%로 축소되었다. 12살의 유대인 소년 데리다는 반에서 수석을 했지만 학교에서 퇴출당했다. 유대인 교사들도 직업을 잃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다. 독일의 패전 뒤에도 이 인종 차별 법률은 소위 ‘자유’ 프랑스 정부에 의해서 6개월이나 더 지속되었다.

학교에서 추방된 뒤 데리다는 해직 교사와 유대인 청소년들이 만든 유대인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그는 이 시기에 학교 공부보다 공 차는데 더욱 열심이었다. 그는 프로축구선수가 될 생각으로 여러 번 축구 경기에 나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축구를 그렇게 잘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프로선수의 꿈을 접었다.

축구에 빠져 생활했던 데리다는 대학입학자격 시험에서 낙방한다. 두 번째 시도에서 그는 엘리트 대학에 들어 갈 수 있는 좋은 성적을 받았다. 이 시기에 그는 같은 알제리 출신인 알베르트 까뮈(Albert Camus, 1913~1960)에 대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고 난 후 철학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는 공부를 하러 프랑스 파리로 갔다. 고등사범(Ecole Normal Superieure)에 입학 한 첫날 그는 같은 알제리 출신인 알튀세르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알튀세르는 훗날 <맑스를 위하여>, <자본론 읽기>를 써서 유명한 맑스주의 이론가가 된다.

그러나 그는 정신착란상태에서 아내를 살해한 죄로 오랫동안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자살로 생애를 마감했다. 그는 푸코와도 친분을 쌓았다. 학창시절에 데리다는 벨기에 루뱅에 있는 후설 아키브를 방문했고, 후설을 연구해 <후설 현상학에서의 생성의 문제>를 졸업 논문으로 제출했다.

이동희
알튀세르
프로축구선수를 꿈꾸다


1956년에는 장학금을 받아 하버드 대학에 1년간 방문 연수 자격을 획득했다. 1957년 6월 보스턴에서 심리분석가 오쿠튀리에(Marguerite Aucouturier)를 만나 결혼을 했다. 미국에서 돌아 온 후 1960~1964년까지 소르본느 대학에서 조교로 강의했다.

1962년 알제리 독립전쟁이 종식되고 그는 최초의 주요 저서이자 번역서를 출간했다. 그것은 후설의 <기하학의 기원>의 번역과 함께 실은 단행본 분량의 해설서였다. 그는 이 저작으로 장 카바예 상을 수상했다.

1965년에 그는 실증주의적 문학 연구의 주장에 반대하는 새로운 문학비평지 <델켈>지와 교유를 시작했다. 그는 이 해에 이폴리트와 알튀세르의 초청으로 고등사범학교에서 강의를 하였다. 1966년에는 존스 홉킨스 대학 학술대회에서 <인간과학의 담론 속에서 본 구조, 기호 그리고 놀이>를 발표해 높은 호응을 얻었다.

이 발표는 북미 문학비평가들에게 해체론이 최초로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1967년에 데리다는 본격적인 저서 <목소리와 현상>, <글쓰기와 차이>, <그라마톨로지> 세 권을 발간해 냈다.

그의 주저 <그라마톨로지>는 서양 형이상학의 문자에 대한 편견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러한 편견은 ‘인종중심주의’, ‘음성언어중심주의’, ‘로고스 중심주의’에 기초한 것이다. 이러한 편견에 기초한 서구의 형이상학은 현전의 형이상학이다.

데리다는 서양형이상학이 ‘진리’로 가정하는 궁극적인 무엇이 따로 있다는 믿음과 그것에서 출발하는 현전의 형이상학은 결국 모든 가치의 서열 체계를 매기려는 욕망이며 따라서 억압의 구조라고 폭로한다.

또한 현전의 형이상학이란 지금 눈앞에 있는 것만 중시하고 그밖의 다른 시간성을 배제한다. 따라서 로고스 중심주의에서는 음성언어를 절대기준으로 삼고, 역사성을 그 속에 담는 문자언어가 억압, 무시되어 왔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산종>(Dissemination, 1972)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서 나오는 토스와 타무스의 신화를 이야기한다. 토스는 글을 발명한 신이다. 토스는 자신의 창조물인 글을 이집트 왕 타무스에게 건네주려 한다.

글은 세대를 걸쳐 내려 왔던 구술 전통 보다 더 많은 정보를 저장할 수 있고, 기억을 저장할 수 있는 형식이다. 그러나 이집트 왕 타무스는 글은 인류에게 이로움보다 위험이 더 크다고 판단해 신의 선물을 거부한다.

백성들이 이제 더 이상 사물을 외우면서 배우는 어려운 작업을 하지 않고 책에서 찾기만 한다면 그들의 기억력은 쇠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책은 스승이 항상 옆에 붙어서 인도하고 안내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스승이 없다면 학생들은 자신이 읽는 것을 잘못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명한 선생은 종이와 잉크 보다 커다란 권위를 가진다. 그러한 권위가 글로 인해 스승과 제자의 사회적 구속력이 해체되게 될 것이라고 염려한다.

이 일화에서 보는 것처럼 플라톤은 말을 글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에게 말은 문자보다 ‘선한’ 종류의 글, 즉 ‘학습자의 영혼 속에 새겨진 것’으로 부각된다. 데리다는 플라톤의 경우처럼 철학과 종교의 서양적 전통에 있어 고유하게 나타나는 글에 대한 말의 특권적 우월성은 편견이라고 주장한다.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에서 텍스트에 대한 해체적 독해를 제시한다. 전통적인 텍스트는 저자의 기의가 담겨 있는 책이나 글을 뜻한다. 따라서 텍스트를 해석한다는 것은 저자의 기의를 파악하는 것으로 인식됐다.

이동희
이집트 상형문자
텍스트의 새로운 이해

그러나 데리다는 텍스트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는 기호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아니하고 기호들의 전체 체계 안에서 그것이 놓여지는 위치에 의해서 어떤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라는 현대 언어학의 중요한 교훈을 수용했다.

그러나 그는 언어는 의미를 고립화된 용어로 고정시키기에는 너무나 빠르게 움직이는 급류라고 주장한다. 해석의 대상인 텍스트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며 그 속에서 언어의 의미는 자유롭게 놀이를 한다. 따라서 언어의 확정적인 개념 정의는 불가능하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나타내 위해 ‘차연’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이 차연이란 말은 ‘차이’와 동시에 ‘연기하다’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differer’를 합성해서 만든 신조어이다. 차연은 ‘다르다’라고 하는 프랑스어 중 변칙인 ‘a’를 넣어서 만든 것인데, 표기만 다를 뿐 발음만 하게 되면 표준 스펠링과 차이가 없다. 차연은 어떤 단어나 문장이 확정적이고, 고정적인 의미 맥락을 담지하지 못하고 그 뜻을 끊임없이 유예시키는 현상을 일컫는다.

<그라마톨로지>에는 차연 못지않게 유명하지만, 악명 높은 말이 등장한다.

“텍스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데리다는 정말 텍스트 밖에는 언어와 독립된 실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인가?

<다음호에 계속>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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